지난 기획/특집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40일] - 두 번째 이야기

입력일 2021-02-23 수정일 2021-02-23 발행일 2021-02-28 제 3233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무기력함 때문인지 몸이 생각처럼 빠르게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지속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너무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에 물든 탓이다. 다행히 나태해질 때마다 도전 종목을 알게 된 가족이나 지인들이 넌지시 도움을 건넨다. “비닐 안 쓴다며? 시장 가봐!”, “스마트폰 대신 책 읽고 묵상한다며~” 격려(?)의 말에 자신을 다잡고 매일매일 새롭게 의지를 불태워 본다. 춥다고 자전거를 놓을 수는 없다! 예수님, 보고 계시죠?

■ 비닐 안 쓰기

“소포장 물품 많은 마트 대신 찾은 재래시장

용기에 포장해오니 비닐 쓰레기 없어 뿌듯”

소포장 비닐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시장’을 떠올렸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기자는 장을 보기 위해 전통 재래시장을 찾은 적이 없다. 시장은 그저 맛있는 먹거리를 위해 찾는 곳이거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 곳으로 생각했지 일상적으로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리 철저하게 포장된 채로 물건을 파는 마트나 슈퍼마켓 등과는 달리, 그래도 시장에서는 장바구니나 개인 용기 등에 내가 원하는 양만큼 물품을 구입해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시장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시장 방문의 목적은 본격적인 장보기라기보다는 탐방에 가까웠지만 미리 플라스틱 용기와 장바구니, 봉투 등을 출근 전 집에서 챙겨 나왔다. 여러 개의 용기를 들고 나와 부피가 상당해 조금은 걸리적거렸으나 사순절 희생 행위로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집 근처에는 재래시장이 없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후배 기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서울 중곡제일시장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시장에서 과일이나 채소류를 구입한다면 마트와 비교할 때 훨씬 비닐을 덜 쓸 수 있었다.

과일의 경우, 미리 포장돼 있는 것은 물러지기 쉬운 딸기나 홍시 정도였고, 딸기도 많은 양은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놓고 팔아 용기를 가져가 담으면 비닐 없이 구매 가능하다. 그 외 사과, 배, 단감, 귤, 한라봉 등은 원하는 개수만큼 살 수 있어 미리 장바구니나 그물망 등을 준비하면 비닐을 전혀 안 쓰고 구입할 수 있었다.

시장 음식 포장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기 위해 김밥집, 분식집, 만두가게를 찾았다. 세 군데 모두 미리 준비해간 용기에 음식을 담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가게 사장에게 물으니 용기를 가져와 담아가는 손님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아마 용기를 갖고 가지 않았더라면 가게마다 최소 2~3개 이상의 스티로폼 용기와 비닐을 사용했을 것이다. 떡볶이 하나만 봐도 떡볶이를 비닐에 담은 다음 그 봉지를 다시 스티로폼 그릇에 넣어 포장하고 있었고, 서비스로 주는 국물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까만 비닐봉지에 한 번 더 담는 것까지 따져보면 비닐 사용량은 결코 만만치 않다. 또한 음식물이 묻은 비닐들은 재활용도 되지 않아 그대로 버려진다.

음식 포장을 마치고 나니 별 것 아니지만 괜히 뿌듯했다. ‘사랑한다면 용기 내’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상 속 환경 사랑 실천이 그렇듯이 ‘비닐 안 쓰기’는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실천했을 때의 보람도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이번 주 ‘용기 내기’를 시작으로 다음 주에는 비닐 안 쓰기의 지평을 보다 더 넓혀야겠다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져본다.

<김현정 기자 sophiahj@catimes.kr>

■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이동하며 예수님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의식하며 떠올려 보니 그분 사랑이 궁금해졌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하신 당부에도 제자들이 자고 있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라며 하신 말씀이었다.

도전 과제를 정할 때 내겐 이 성경 구절이 주효했다. 집부터 회사까지 거리는 7.6㎞, 자전거를 타면 왕복 1시간 30분이 걸렸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1시간 이상은 매일 예수님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출퇴근하지 않는 주말엔 걷기를, 자전거 타기나 걷기가 어려운 궂은 날엔 기도를 1시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작하고 보니 하루 1시간 예수님과 깨어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실행하면 됐지만, 행위 속 예수님을 늘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천 사항의 번거로움에 힘이 쏠려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매일 밤 운동복을 챙겨 놓고,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 등 물리적으론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레 예수님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잠들면 금세 일어나 집을 나섰고, 자전거를 타면서도 두리번거리다보면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는커녕 집에서 회사, 회사에서 집을 정신없이 오갔다. 육체적 행위에 그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좇는 정신적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예수님을 늘 기억하려 했다. 자전거를 타다 오르막길을 만날 땐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 봤고, 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무덤에 묻히시지만 곧 부활하실 예수님 마지막 순간을 그려 보았다. 주말,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대신 1시간 걷기를 실천하면서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걷기 전 예수님 수난을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며 걸을 때 묵상할 그분의 모습을 더 생생히 접해 보려 했다.

그렇게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기울이자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예수님 사랑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춥지 않아? 지하철 타~”하는 이야기들에도 흔들리지 않게 됐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란 단지 육체적 수고로움이 아닌 예수님과 깨어 있을 수 있는 소중한 1시간이기 때문이다.

단식과 금육, 기도, 나눔 등 우리는 사순 시기 다양한 행위를 절제하거나 실천한다. 그러나 행위에만 집중해 예수님을 떠올리는 노력을 소홀히 하면 이는 허울뿐인 신앙에 지나지 않다. 행위 속 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

■ 책 읽고 묵상하기

“24시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스마트폰과 이별

책과 함께 편안하고 고즈넉한 감정을 맛 보다”

‘아, 스마트폰 세상이 궁금하다!’

책을 읽으려고 보니 자꾸 스마트폰 세상이 궁금해졌다. 마치 스마트폰 속 누군가가 부르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놨다가도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와 그동안 스마트폰에 너무 의존했구나….’

그동안 마치 24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잠들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효율적인 시간 관리는 아니었다. 우선, 독서와 묵상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스마트폰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며 각 기능을 분리했다. 특히 집에 있을 때는 꼭 필요한 메시지는 컴퓨터로 주고받고 미국 드라마를 볼 때는 TV를 이용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멀리하자 제일 먼저 악몽이 줄었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거나 다양하게 펼쳐지는 범죄를 막으려고 애쓰는 꿈을 꿨는데, 꿈이 한결 편안해졌다. 꿈을 꾸지 않는 날도 늘어갔다. 물론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집어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는 주일 복음을 묵상했다. ‘사탄아, 물러가주라!’

첫 번째 묵상 책으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두 번이나 추천한 「세상의 주인」을 골랐다. 지난 여름 휴가 때 읽으려고 야심차게 장만했는데, 진지한 내용에 500쪽에 달하는 장편 소설을 진득하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책장에 예쁘게 꽂아 뒀던 책이다.

소설 속 세상은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설정으로, 극단적 물질주의와 인간 중심주의 등 세속적인 가치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안락사 대원들도 등장하는데, ‘진정한 성직자는 안락사 대원들’이라는 소설적 표현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안락사를 해주는 것이 큰 은총으로 비춰지는 대목도 나온다. 심지어 가톨릭 신앙은 ‘허황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가슴 아프지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사제 퍼시 프랭클린은 세상과 그리스도교 둘 다 포기하지 않는다. 부활을 기다리는 자세로 가톨릭 신앙을 살아 낸다. 프랭클린 신부는 불안한 마음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노인에게 “환상에 지지 마십시오. 그저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자기 의식에 버틸 힘을 주는 유일한 존재는 묵상이라고도 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앉아 한 주의 복음과 묵상집을 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삶은 편하지만 허무하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세례로 불러 주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포악해지고 때로는 널뛰는 감정을 편안하고 고즈넉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주일 밤, 묵상과 함께 한 주를 준비하며 스마트폰 첫 화면에 묵상집에서 만난 성경 구절을 적어 뒀다.

“총애받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다니 10,19)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