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70) 마음의 거리(상)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1-26 수정일 2021-01-26 발행일 2021-01-31 제 3230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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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새해 첫날, 개갑장터성지에 있다가 수도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오후 4시 즈음 됐을까.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확인해보니 ‘신부님, 오늘 저녁 시간되세요?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으로, 경찰 공무원인 자매님께서 보내신 문자였습니다. 그 문자를 보자, 나는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 분은 내가 지금 서울에서 본당 사목을 하는 줄 알고,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는 문자를 보내셨구나! 어쩌나, 나는 지금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 자매님께 안부 인사도 할 겸 전화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자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신부님, 전화 주셨네. 지금 시간에 신부님께서 뭐 하시는지를 몰라서 문자를 보냈어요.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시간은 되는데, 지금 남편분과 같이 계셔요?”

“아뇨, 남편은 오늘 광주 시댁에 볼일 보러 갔어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저녁식사나 같이할까요?”

“하하하. 우리 자매님께서 이제 혼자서 저에게 식사하자는 전화도 다 하시고. 나이를 드시기는 하셨네요. 하하하. 그런데 자매님, 어쩌죠? 저 지금 서울에 있는 게 아닌데요?”

“아, 예, 알아요. 신부님, 지금 고창에 살고 계시잖아요.”

“앗! 제가 고창에 사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자매님께선 내가 전라북도 고창에 내려와 살고 있는 걸 이미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신부님, 저 지금 개갑장터성지에 왔어요, 개갑성지!”

“네-에-엣? 이런 … 거기가 어디라고. 그 먼 길을.”

“신부님 근황을 알고 있는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연락을 해서, 신부님께서 개갑성지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어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거기가 어딘지 궁금해서 온 거예요.”

“그러면 지금 서울에서 성지까지 혼자 오신 거예요? 아니면 남편 분께서 광주 가시는 길에 자매님을 성지에 데려다 주신 건가요?”

“오늘은 우리 부부 각자 움직였어요.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남편은 광주로, 저는 고창으로 가는 버스를 탔어요. 그래서 고창에 도착해서 개갑성지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 본 후에 그 버스를 타고 지금 막 성지 앞에 내린 거예요. 신부님, 갑자기 연락해서 죄송한데, 암튼 바쁘시면, 저는 여기서 묵상 좀 하다가 다시 고창으로 가면 돼요. 편하실 대로 하세요.”

“세상에 … 이런 … 세상에. 아니, 그래도 의리가 있지. 제가 지금 성지로 갈게요, 자매님! 이렇게 개갑장터성지에 순례를 오실 거면 어제 저녁이나, 오늘 아침에라도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저는 30분 전까지 성지 사무실에 있다가 방금 숙소로 돌아왔거든요. 암튼 자매님, 거기 가만히 계셔요.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예.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서 기도하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정말이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됐습니다. 이곳, 개갑장터성지로 순례를 오실 거면 - 따스한 봄날, 날이 좋을 때 오시면 좋을 텐데, 전날 눈까지 많이 왔던 이곳, 서울에서는 멀고도 먼 고창으로 - 굳이 1월 1일에 순례를 오시다니! 함께 사는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후, 차를 몰고 성지로 갔습니다.

공소에서 성지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인데, 가는 동안 혼자 별 상상을 다 했습니다.

‘혹시 남편분과 대판 싸웠나! 아냐,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올해가 자매님 정년퇴직인가? 그것도 아닌데. 정년은 몇 년 남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차는 어느새 성지에 도착했고, 기도를 마치신 자매님께선 성지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말입니다.(다음 호에 계속)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