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사람 볕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
입력일 2021-01-05 수정일 2021-01-05 발행일 2021-01-10 제 322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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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볕’이라는 말이 참 따뜻하게 들린다.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붙여진 언어일 터다. 어진 이의 배려와 관심, 포용은 상대의 체온을 덥혀 주기에 충분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단어를 접하는 순간 오래전 ‘인성의 집’에서 봉사했던 기억이 소도록이 되살아난다.

인성의 집은 끼니 해결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중식을 제공해 주는 간이 식당이었다. 일손 봉사는 대구 시내의 성당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했다. 드디어 우리 성당 차례가 되어 내가 소속된 레지오 단체가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우리 단원 다섯 명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각기 희사할 먹거리를 들고 성당으로 모였다. 가지 못하는 단원들도 응원차 격려금과 묵은김치, 된장 등 식품을 들고 와 내밀고 갔다. 산더미가 된 물건들을 움직일 방법을 고민 하는데 성체조배를 하러 온 교우가 이를 눈치채고 선뜻 봉고차를 태워주어 수월하게 도착했다.

우리는 사람 좋게 생긴 형제님 지시에 따라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도 장만했다. 그분은 자청해서 삼백육십오일 책임자로 봉사하는 의식 있는 분이라고 했다. 두어 가지 반찬이 얼추 끝나자 책임자가 봉사자들 먼저 밥을 먹자고 했다. 밥값은 그날 인원수를 헤아리는 단위라 단돈 100원이라며 봉사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단원들은 서로 자기가 한턱내겠다고 밀고 당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드디어 쨍그랑쨍그랑 알루미늄 그릇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더니 손님들이 줄을 서서 들어왔다. 어느 구석에 있다 왔는지 꾀죄죄한 표정과 허름한 옷차림의 인간 물결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늙거나 병이 있어 이런 신세를 지겠지 생각하며 밥과 국을 담고 찬을 놓으며 우리는 정성껏 봉사했다.

쉴새 없이 밥을 푸는 내 어깨를 한 단원이 집적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턱짓을 했다. 그 턱 끝엔 허우대가 멀쩡한 남정네 몇 명이 대열에 끼어 있었다. 단원은 어디 가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겠는데 왜 이런데 얻어먹으러 오느냐며 내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나 역시 고운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우리의 힐난과 지청구에는 상관없다는 듯 밥상을 여유롭게 받아 미소까지 띄우며 잘도 먹었다,

그럭저럭 일이 끝나고 남은 음식은 소년가장이라는 아이와 두 명의 노인에게 저녁거리로 챙겨주었다. 책임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 지역의 높은 분이 와서 금일봉을 쥐어주고 갔다고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그러면 그렇지’ 하며 무릎을 쳤다. 뜻이 있어 방문한 사람들인데 세상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귀가를 하려니 절차가 좀 복잡했다. 버스로는 한 번 갈아타야 하고 택시는 정원이 넘어서 두 대로 가야 했다. 차비는 버스를 타거나 택시 한 대로 가는 가격이 비슷한데 택시 두 대를 타면 큰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우리 앞에 택시가 한 대 미끄러지듯 달려와 얌전히 멈췄다. 우리는 성큼 오르지 못하고 사장님 우린 다섯 명인데 요금을 좀 더 드리고 누구 한 명 누워버리겠으니 눈감아 달라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오케이라며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우리가 모두 타자 기사분은 자기도 먼저 주일에 인성의 집 봉사를 했다며 같은 교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건 우연이 아니며 필연 즉 하느님의 섭리라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자연 차 안의 분위기는 친형제를 만난 듯 화기애애했고 신앙생활에서 쉽게 공유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분은 요금은커녕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돈을 내밀었지만 그는 도로 “내가 착한 일을 하게 도와달라”며 사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차 안으로 던지니 “내 천국에 보화 쌓는 거 심술이 나느냐”고 벌컥 성을 냈다.

야단은 야단도 아닌 그 날 진풍경은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아마 높은 데서 내려다보신 하느님도 흐뭇했을 터이다. 아니 이날은 하느님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주관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으로, 먹거리로, 차로, 몸으로 봉사했던 그 날 사람 볕은 참 따뜻했던 것 같다.

채정순(아녜스·대구 두산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