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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김대건의 시간을 걷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0-12-28 수정일 2020-12-29 발행일 2021-01-01 제 322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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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역경 이기고 목숨 바쳐 이 땅에 복음의 씨앗 심어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탄생
15세 때 세례… 신학생 발탁
건강과 조선 입국 문제 딛고 꾸준하게 신학 공부 이어가
1845년 중국에서 사제수품
짧은 시간 신자들 돌보다 혹독한 고문 뒤 1846년 순교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죽이겠소.”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용맹했던 순교자 김대건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 김대건이 어떻게 성인 김대건이 될 수 있었는지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다. 죽음 앞에서조차 “나는 천주교인”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 성인 김대건이 되기까지 김대건이 걸어온 시간을 함께 걸으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면 어떨까.

■ 성가정이 일군 신앙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 김대건의 시간은 여기서 시작된다. “시작이 반이다.”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대건에게 이처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김대건에게 신앙의 스승은 가족이었다. 김대건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비오)의 세례를 계기로 솔뫼에 거주하던 김대건의 일가친척은 모두 신자가 됐다. 특히 복자 김진후를 시작으로, 숙조부인 복자 김종한(안드레아), 부친인 성 김제준(이냐시오) 등 여러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신심이 깊은 집안이었다. 또한 이들 가족은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고자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서울 청파동, 한덕골, 골배마실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생활했다.

이런 가족들의 굳은 믿음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김대건은 평생에 걸쳐 선대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아 소중히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에게 신앙은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김대건이 15세 되던 1836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된 것도 그가 성가정에서 자란 덕분이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첫 조선인 신학생을 찾을 때 천주교 집안의 소년으로 신앙심이 깊고 사제 성소를 희망하며 건강·근면한 이를 선발했다. 신심 깊은 천주교 집안에서 충실하게 신앙교육을 받아온 김대건이었기에 모방 신부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 역경, 역경, 그리고 역경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를 향했지만, 사제가 되기까지의 길에 김대건을 기다린 것은 수많은 역경과 좌절이었다.

우리는 김대건을 ‘최초의 조선인 사제’로 기억하지만, 김대건이 사제가 될 수 있을지를 그의 스승들조차 염려하는 신학생이었다. 일단 함께 선발된 신학생들은 이미 라틴어 수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4개월 늦게 선발된 김대건은 동기들에 비해 신학 공부의 기본이 되는 라틴어 실력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스승 신부들은 김대건의 판단이 늘 좋은 것은 아니고, 그의 문체의 완성도도 기복이 심하다며 학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성격 면에서도 경솔하고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신학 공부를 시작한 1837년부터 7년가량 지속적으로 두통, 복통, 요통 등을 앓아 건강상 문제로 사제가 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이어졌다.

어려움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인 신학생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던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837년 위열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아편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필리핀 롤롬보이로 피신해 공부를 이어갔다. 또 부친 김제준이 순교한 것도 1839년 김대건이 신학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1842년부터는 마카오를 떠나 조선 입국을 위한 길 탐색과 신학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조선 입국을 위한 김대건의 시도도 번번히 실패했다. 프랑스 함대를 통한 입국 시도를 시작으로 의주와 책문 등 중국에서 육로를 통해 입국하고자 5차례에 걸쳐 시도했지만, 1844년 부제품을 받기까지 결국 안전한 입국로를 찾지 못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과 필리핀 등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김대건 성인은 1845년 사제품을 받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다 1846년 순교한다. 그래픽 정희선

■ “천주님의 안배로써”

순조롭기는커녕 우여곡절 속에서 신학생 생활을 한 김대건이지만,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그 숱한 역경을 오히려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얻은 약으로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매스트르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의 체질이 튼튼해져 신학 공부를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됐다”며 “그는 참된 빛에 눈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입국로를 찾기 위한 갖은 실패 속에서도 중국과 세계 정세를 파악해 나갔고, 중국인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빠르게 체득해 나갔다. 프랑스 함대에 체류하는 동안은 프랑스어를 익히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페레올 주교 등을 영입하는 등의 활동에 큰 보탬이 됐다.

김대건의 편지를 살피면 난관을 극복할 때마다 “천주님의 안배”, 즉 하느님의 섭리가 도와주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내용이 드러난다. 조규식 신부(대전교구 원로사목자)는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통해 “김대건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적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조선입국로 개척을 위한 김대건의 끈질긴 노력은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그의 스승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 특히 부제가 된 김대건이 1845년 조선 입국에 성공해 넉 달간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온 일은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에게 먼저 사제품을 줘야겠다고 결심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의탁으로 김대건의 단점이었던 경솔함은 용기가 된 것이었다.

■ 사제 김대건, 그리고 순교

마침내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진쟈샹(金家巷)성당에서 사제품을 받는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을 향했다.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표류했지만, 다행히 제주도에 표착 후 재정비해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강경 황산포 인근에 정박해 조선에 입국했다. 김대건은 입국 후 한양, 경기 지역 신자들을 위해 활동했지만, 1846년 6월 5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찾으러 백령도 등을 살피다 붙잡혀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김대건이 사제로 살아간 기간은 고작 13개월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냈고, 4개월은 감옥에 투옥된 시간으로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약 7개월여에 그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보여 준 빛이 한국교회 신자는 물론, 비신자, 나아가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김대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밝힌 것은 그가 걸어온 전 생애를 통해 꾸준히 쌓고 닦은 삶과 신앙이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