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약함의 강함 / 양하영 신부

양하영 신부 (제1대리구 남양본당 주임)
입력일 2020-12-21 수정일 2020-12-22 발행일 2020-12-25 제 322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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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보다 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강하기에 이룰 수 있는 것이 많고 인정받을 수 있다. 반면에 약함은 약육강식의 역사 속에서 도태됨을 생각하게 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 사람의 역사를 보아도 늙음과 병으로 몸이 약해졌을 때 정신적 문제까지 오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약함의 시간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약함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과연 강함을 위해서 약함을 떨쳐 내야만 하는 걸까?

예전 성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강했다. 아이들이 성당에서 놀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하였고, 무한 체력을 가진 그 아이들과 쉼 없이 뛰어놀았을 정도였다. 여름 신앙 캠프에서 물놀이를 할 때, 교사들이 나를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물에서 아이들이 산을 이룬 곳 안에 내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만큼 즐거웠고 그 시간을 함께할 만큼 강했다.

하지만 강함을 쥐고 살 수 있게 해주었던 체력이 아픔과 함께 한순간 무너지게 되었다. 볼펜 하나가 무거워 손에 쥐지 못할 정도로 모든 체력이 바닥을 찍었다. 강함이 무너졌을 때 다가오는 상실감과 자괴감, 비참함은 잔인하게 목을 조르며 자존감을 끝없는 늪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이들과 더 뛰어 놀 수 없었다. 아이들이 뛰어와 안기고 끌어당기는 것이 힘들어 비참함에 짜증이 치밀었다. 짜증은 더욱 커져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변했다. 걷잡을 수 없는 강함의 몰락이었다.

무너진 강함에 지쳐있던 어느 날, 성전 계단에 주저앉았을 때 아이들이 내 주위에 모여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가 무엇인지, 부모님과 형제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화났던 일, 행복했던 일, 뛰어놀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아이들의 삶이었다. 아이들의 진심과 진짜 이야기를 강함이 무너져 모든 삶이 약해져 있는 그 순간 알게 된 것이다.

강함의 기준을 나 혼자 세워 ‘이것이 강함이고 저것이 약함이다’라고 판단을 했었다.

내 기준의 강함이 무너지고 남은 것은 약함뿐이었지만 그 약함은 더 약함이 아니었다. 내 기준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새롭고 진한 강함이었다. 뛰어놀 수 있는 강함 대신 아이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약함의 강함’을 마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약한 이들에게 가신 이유도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약함 안에서 꽃을 피우시는 하느님 뜻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소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가장 비루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강함과 약함의 구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약함이 두려워 떨쳐내려는 강박은 잠시 내려놓고 나의 약함에조차 물과 빛으로 꽃 피우시려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약함의 강함’으로 하루를 다시 살아가 보는 것은 어떠한가.

양하영 신부 (제1대리구 남양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