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겨울 바닷가에서 / 홍순영

홍순영(지타) 수필가
입력일 2020-12-15 수정일 2020-12-17 발행일 2020-12-20 제 322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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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은빛 햇살이 눈이 부시다. 갈매기들은 세상모르고 바다 위에서 춤을 춘다.

물빛이 사시사철 변하는 아름다운 강릉 바닷가, 오늘은 초록빛으로 멋지게 물들여져 있다. 바닷가에서 살고 싶던 꿈은 우연히 20여 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막상 가까이 와서 살게 되니 사실 그리 안 가게 된다. 어쩌다 지인들이 오면 바다가 마치 내 것인 양 마음껏 선물해 준다.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요즘은 가끔 혼자 찾아온다. 예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포근함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카페 ‘애너밸 리’에 들렀다.

그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제목에서 따온 이름인데 바닷가에 있어서 그런지 운치도 있지만 정감이 있는 예쁜 집이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애너밸 리’ 시가 크게 쓰여 있다.

“아주 오래고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 그녀의 소원은 오직 하나,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것뿐 / 바닷가 왕국의 어린 아이였던 나와 그녀 / 하지만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나와 애너밸 리는 날개 달린 하늘의 천사들도 우리를 부러워할 만큼”

(…중략…)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이 시가 오늘따라 유난히 애절하다.

어린 소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하늘의 천사들이 시샘을 해서 아주 먼 곳으로 데려 갔을까! 나도 그런 사랑을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혼자 웃어본다.

금년 여름에 내 생에 아주 큰일을 겪었다. 곁에 있던 남편이 아주 멀리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오랜 시간을 병고에 시달리다 가슴 아프게 갔지만,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기에 천상낙원으로 갔으리라 믿는다. 한 사람은 가고, 나의 남은 삶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주님 보시기에 좋으실까 침묵 속에서 나를 찾아본다.

어제 미사 강론 때 신부님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맞다. 멀리 떠난 남편은 나에게 고통도 많이 주었지만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착하게 살았지, 나도 그 모습 닮아 이웃에게 많은 사랑을 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이제 곧 바다에 눈이 내릴 것이다. 그 광경이야말로 어떤 화가도 흉내 못 낼 정도로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다. 그 순간 나는 바다 속으로 그저 들어가고 싶다. 바다는 어머니처럼 한 없이 내리는 눈을 그저 껴안는다. 눈도 비도 바람도 그 모든 것을 가슴으로 품는 바다. 하느님 사랑도 저 바다와 같고, 포근하다. 가슴에 있는 슬픔 기쁨을 모두 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침묵으로 이야기하고, 침묵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도 나는 저 넓고 푸른 바다 앞에서 ‘애너밸 리’의 사랑을 꿈꾸며 바다의 왕국을 짓고 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의 사랑을 시샘해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나를 데리고 갈 때까지 그렇게 사랑을 할 것이다. 바다는 나의 친구이며 그리고 스승이다.

카페에 어둠이 찾아오고 바다도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멀리 하얗게 파도만 눈에 들어올 뿐. 이 예쁜 카페에 손님이 줄어든 것은 아무래도 전염병으로 인한 것이다.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연인들, 가족들도 이제는 모두 몸도 마음도 불안에 떨고 있기에, 바다를 찾는 곳조차도 엄두도 못 내기에 가슴 아프다. 다행히도 나는 바로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어 언제든 친구처럼 만날 수 있는 것도,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주님, 어서 이 세상을 저 푸른 바다처럼 평온하게 만들어 주시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모두 ‘애너밸 리’ 같은 사랑을 꿈꾸며 바닷가에 저마다의 왕국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겨울 바다는 너무 외롭거든요.

바다 같은 주님!

사랑의 주님!

우리 모두의 주님!

홍순영(지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