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매일 기다렸습니다, 아기 예수님!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20-12-01 수정일 2020-12-02 발행일 2020-12-06 제 322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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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제1독서 (이사 40,1-5.9-11) 제2독서 (2베드 3,8-14) 복음 (마르 1,1-8) 

세상에는 아름다운 표현이 많습니다. 저는 그중에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아끼는데요. 무언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 담긴 행복의 향기가 너무 좋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대림 시기는 애틋하고 복됩니다. 귀한 만남을 기다리는 참 행복한 때이지요.

지난해, 성전의 구유를 치울 때였습니다. 교우분들이 아기 예수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정경을 카메라에 저장하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퍼뜩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을 기다리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혹여 구유가 차려진 그 시기에만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사목적 잘못은 다시 없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만에 한 분이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라는 노파심이 일었던 겁니다.

그러다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일 년 내내 간직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는데요. 곧장 교우분들께 제안을 드렸지요. 이제부터는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내내 간수하기 위해서 구유예물을 매일 혹은 매 주일마다 모아보자고요. 2020년 성탄에는 일 년 동안 모은 정성 어린 예물을 아기예수님께 선물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계획이 너무나 좋고 좋았던 저는 그날부터 당장 실천에 들어갔는데요. 이제 한 해가 다가오니 예물주머니가 제법 두둑해졌습니다. 스스로 기특해서 오늘 아침에도 ’쓰담쓰담‘ 셀프칭찬을 날렸더랬습니다.

솔직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과연 몇 분이나 그 약속을 실천하고 계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잊지 않고 매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직하신 분들이 꼭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올해 우리 본당의 구유예물이 전국 최고치를 경신할 것만 같아, 으쓱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의 첫 구절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마도 복음서의 제목이었으리라 짐작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명한 문구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는데요. 무엇보다 “보라”라는 강한 명령어로 복음서를 열고 있다는 점이 그랬습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드로 사도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요. 이를테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생활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며 고백인 셈인데, 그 첫 어휘가 “보라”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복음의 시작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고 알리기 위한 서두를 허투루 골랐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수도 없이 앞에 놓은 이야기와 뒤를 이을 사연을 재편집하며 고심했을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고민한 끝에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테니 말입니다.

바르톨로메우스 브레인베르흐 ‘요한 세례자의 설교’(1634)

오늘 우리는 사도의 권유에 따라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며”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온통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또한 평생을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하여 살았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칭찬을 들었던 사실을 되새깁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오롯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순수한 믿음의 자세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신다는 고백으로 들어도 무방하리라 싶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굳센 믿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주님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설사 우리의 생각이 한참 모자라고, 우리의 믿음이 약간씩 흔들거리고, 우리의 회개가 반나절에 그친다 해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리시는 주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크신 하느님 앞에 작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주님께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니요? 아,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복음생활은 이토록 단순하고 쉽다는 뜻이라 새겨봅니다.

물론 예수님을 ‘보라’는 사도의 권고에 오롯이 따라 살기 위해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에 예민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결한 시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지 않아야 하는 것들에 단호해져야 할 것입니다.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만이 주님을 뵙는 밝은 영안을 갖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인권 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세상의 이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라’고 선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3요한 8)임을 선명히 알려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대림, 예수님께서 우리와의 만남을 우리보다 더 손꼽아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땅으로 보내심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우리 몸과 영과 혼에 가득 차오르기를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