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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 김의태 신부

김의태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20-11-17 수정일 2020-11-17 발행일 2020-11-22 제 322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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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교단체는 14만4000명 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묵시 14,3)에 정확히 적혀있다는 근거로 말이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요한묵시록은 상징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묵시록에는 악마의 숫자로 알고 있는 666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묵시 13,18) 이는 당시 로마인들에게 정복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 숫자는 로마 지배에 순응하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세상의 것에 굴복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한다. 반면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을 14만4000명으로 묘사한다. 이는 실제 수가 아니라 충만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상징적으로 완전한 숫자인 12의 출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하는 3과 세상 전체를 상징하는 4를 곱한 값이다. 하느님 계획의 완전성을 뜻한다. 또한 요한묵시록 20장에 등장하는 1000년의 통치는 하느님 왕국의 다스림을 상징한다. 그리고 21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 도성은 네모반듯하고 길이와 너비가 같은 정육면체 모양으로 1만2000 스타디온, 즉 12×10×10×10으로 완전성(12)과 하느님의 왕국(1000)을 곱한 값이 된다. 결국 14만4000명이라는 숫자는 12×12×10×10×10으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날 구원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 구원계획에 포함된 모든 백성을 상징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제한하기 위한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4만4000명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점수 따야 하고, 시험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구원이 숫자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 고진하 목사는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암암리에 매겨지는 서열화, 계량화, 수치화를 부추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연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심지어 자동차의 배기량 크기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기도 한다. 세상의 원리가 종교에도 흡수되었다면 참으로 슬픈 일 아니겠는가?

만약 낯선 사람이 ‘당신은 구원받으셨나요?’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성경에서 병든 이가 치유를 받았어도 ‘구원’이라 이야기하며,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도 ‘구원받았다’라고 한다. 가난하고 고통받은 이들을 돕는 이들도, 하느님 곁에서 멀어졌던 이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왔을 때도 ‘구원받았다’라고 한다. 즉 세상의 이치와 원리가 아닌 하느님 품 안에서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이미 와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여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김의태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