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제발 믿어다오! / 김의태 신부

김의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20-11-03 수정일 2020-11-04 발행일 2020-11-08 제 321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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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유학 시절, 그곳 본당에서 방학을 보내던 때였다. 연세 많으신 본당 신부님은 내게 본당을 맡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당시 나의 이탈리아어 실력은 그저 여행 다닐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강론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나름 언어 실력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여러 강론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강론이 있다. ‘왜 이탈리아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강론이었다. 이탈리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적 외에도 수많은 기적과 신비로운 유물들로 가득하다. 아시시에 가면 아직도 진행형인 기적이 있는데, 하나는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마치 수호성인처럼 프란치스코 동상을 계속 지키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성 프란치스코가 뒹굴었던 장미밭에 주님께서 가시를 없애 주신 그 장미가 아직도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기적이다.

또 사제의 의심으로 제병과 포도주가 실제 주님의 심장근육과 피로 변모한 성체성혈의 기적, 오상을 받으신 비오 신부님, 토리노의 예수님 수의, 페루자의 성모님 약혼반지, 제노아의 최후의 만찬 때 쓰신 접시 등등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이탈리아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받은 나라다.

마태오 복음서 15장에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제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지만 예수님은 꿈쩍도 않으시고, 오히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 여인에게는 분명 가슴 아픈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님의 자비를 청한다. 그 끈질긴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싫어하는 이민족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 15장 이전 복음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과 오병이어 기적,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들을 행하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말을 해도 믿지 않고, 기적을 행해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고 계신 걸까?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발 믿어다오”라고 호소하고 계신 듯하다. 누구는 선택받은 민족, 또 어떤 나라는 축복받은 나라일지 몰라도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그 기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당시 이민족이었던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끈질긴 믿음에 기권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메시지는 하나가 아닐까? “왜 나를 믿지 못하니? 제발 믿어다오!”

김의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