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제자로 삼아라’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입력일 2020-10-13 수정일 2020-10-13 발행일 2020-10-18 제 321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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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제1독서 (이사 2,1-5) 제2독서 (로마 10,9-18) 복음 (마태 28,16-20)
 교리 전파와 윤리 제시 자체만으로는 선교의 목적 이룰 수 없어
 어떤 차별이나 예외도 없이 모든 민족들에게 은총 주어져야
 복음 선포와 파견은 주님과 긴밀한 관계로 이뤄지는 신비
 진정으로 감동해 믿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전교 핵심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가끔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동급생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는데 여자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남자아이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둘 사이에 느닷없이 짝사랑이 시작되었고, 여자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남자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며 자기의 참고서와 똑같은 것을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남자아이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을, 선물로 준 여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며 조금씩 읽어가며 이해하려 합니다.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었는지... 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결말이 기억 안 날 수가 있지...? 하면서도, 아 공부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워낙 커서 다른 건(결말조차도) 기억이 안 나는가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심각한 저의 건망증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하느님을 억지로 주입시키고 교리 조목들을 강제로 외우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교가 아닙니다. 곁에서 지켜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고 감동적인 사랑이어서 이 기쁜 소식을 자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 복음서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대미(大尾)로서 다시 갈릴래아에서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이고 가르침의 대부분을 설파하신 곳이며 이제 당신의 지상생활을 마무리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시몬 체허비즈 ‘그리스도의 부활’(1758)

■ 제자가 되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날 장소로 갈릴래아를 언급하십니다.(마태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돌아가 예수님을 만나는데(16절)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17절)합니다. 유다인들에게 ‘경배하다’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경외 때문에 그 앞에서 정말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경배 행위 중에도 제자들 “더러는 의심하였다”(28,17)고 합니다. ‘의심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동사는 ‘디스타조’로서 ‘마음이 갈라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 단어는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졌을 때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열한명의 제자들 중 “더러는 의심하였다.”는 표현은 제자들의 불완전함과 결함에 대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해 흔들리고 망설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그대로 놓아두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도덕적 소양이나 교양,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고상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사랑, 구원의지로 완성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의 결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당신의 현존과 구원의 여정을 교회를 통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사명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형을 중심에 두고 ‘가다’, ‘세례를 주다’, ‘지키도록 가르치다’라는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분사형태로 등장함으로써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부연(敷衍)합니다. 즉 가서,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행위는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따른 부차적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고 윤리적인 행동강령들을 제시하며 인류의 공동선을 이룩하는 위대한 과업들을 수행해 오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진정한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리를 배우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할 사안은 우리가 과연 그분의 제자들인가에 대한 정직한 성찰인 것입니다. 제자로 삼을 대상은 “모든 민족들”입니다. 제자의 특권은 그 어떤 차별이나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이며, 이는 보편교회인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를 명확히 표명합니다.

■ 보편적 구원과 그 방법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은 오늘 본문들 안에 유난히 자주 반복(복음과 제1독서, 제2독서, 화답송에까지도)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먼저 선행되어야할 조건으로, 우선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누군가가 ‘선포해야’ 하며, 선포하려면 ‘파견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로마 10,14-15) 그러면서 이 파견이 얼마나 역동적 행위인지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15절)라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복음의 선포와 이를 위한 파견은 단순한 강요나 정치적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특별하고도 긴밀한 관계성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그들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지옥에 갈 불쌍한 인간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리고 소개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서 발생하는 능동적이며 아름다운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교’(傳敎)라는 말의 자구적 의미, ‘가르침을 전하다’에 너무 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강요하고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 전교가 아니라, 우리가 감동하여 믿고 매료된 그 사랑의 관계를 살고 기쁜 마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전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혼란으로 너무도 낯선 절망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더욱 명료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시니, 이제 우리는 그 경이로운 사랑과 구원의 현실을 믿고 충만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에 말해주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자, 주님의 빛 안에서 걸어가자!”(이사 2,5)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