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평화를 빕니다 / 박정순

박정순(루치아) 소설가
입력일 2020-10-13 수정일 2020-10-13 발행일 2020-10-18 제 321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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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괴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들 삶이 말이 아니다. 자유롭고 즐거운 문화생활은 고사하고 가면 같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집안에 칩거해서 살아야만 한다. 그래도 이 괴물은 세계를 무법자처럼 휩쓸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음으로 끌고 간다. 무슨 해결책이라도 되는 듯 모두가 서로 중국 탓 미국 유럽 탓, 네 탓이라고 싸움들만 한다. 실상 “동산을 일구고 돌보아라. 생물들을 잘 다스려라”라고 명하신 하느님 창조의 법을 어기고 바벨탑만 쌓은 인간들 탓이련만 반성하는 기미는 적다.

요즘처럼 안전과 평화에 대한 갈망이 절실할 때도 없을 것이다. 힘든 삶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를 갈망하며 산다. 예비신자 교리반에 온 사람들에게 성당에 오게 된 동기를 물어보면 대부분 평화를 얻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다. 그렇다면 우리 구원, 부활의 모습은 평화인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참으로 주님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한 여인이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대모를 서준 적이 있다. 세례를 받고 얼마 안 가 냉담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남편과 고부 갈등 같은 얘기를 좀 비칠 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다고만 했다. 그 정도는 흔한 일이어서 고해성사를 보면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 마음이 깨끗하고 행복해진다고 하니 고해성사를 봐도 잠시뿐 똑같은 죄를 또 짓고 또 계속 짓게 돼서 더는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그런 죄는 모두 짓는다고 여러 번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나 끝내 속 이야기는 안 하고 냉담한 채 스스로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너무 놀라고 두려운 바람에 속이 상해서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이 센 불쌍한 여인이라고 화를 냈다. 다시는 대모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보고 자기 잣대로 재는 경향이 있어 결코 네 탓이지 내 탓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미사 때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먼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을 치고 참회를 해야 한다. 이러니 참 난센스 같다. 그런데 이게 참으로 난센스일까? 네 탓이요 하는 동안 끊임없이 생기는 고통 때문에 아무래도 “당신의 입장에서도 한 번 봐야 할 것 같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무래도 연미사는 봉헌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미사를 하는 동안 얼마나 괴로우면 죽었을까? 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몹시 괴로웠다. 영혼이 안식을 누리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나니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부족한 나를 보며 그때 주님께 진정으로 솔직히 자신을 고백하고 모두 맡기는 기도를 하게 해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죽음의 공포와 분노 좌절에 빠져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수하러 가자”가 아니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다. 이는 내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면서도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고 기도했더니 부활시켜 주셔서 “이처럼 평화롭게 영광을 누리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도록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주님께 믿음으로 모두 맡기는 기도가 우리를 구원해 주며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 요즘 성당은 피정하는 장소 같다. 모든 것 드러내고 주님께 아기처럼 푹 안겨보니 진정 한없이 평화롭다.

당신에게도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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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루치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