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49) 자연에서 얻은 교훈 (상)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0-08-25 수정일 2020-08-26 발행일 2020-08-30 제 320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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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순교성지 경계에는 장미 나무 서른 그루가 심겨 있습니다. 작년에 은인 분의 봉헌으로 대형 농원에서 장미 나무를 사서 심었을 때는 첫 해라서 그런지, 그렇게 몸살을 하더니, 올 해는 나무들 마다 예쁜 장미꽃들을 활짝 피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본당 교우들 뿐 아니라 성지 앞을 지나가던 동네 분들, 한강으로 걷기 운동가는 분들, 한강 변으로 자전거를 타러가는 분들이 장미꽃을 보고 냄새를 맡거나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곤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 볼 때마다 조용히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장미꽃을 보고 사진을 찍고 있는 분들 모두가 사진의 뒷배경으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고자 죽음을 맞이한 신앙 선조들과 선교사들이 처형된 곳이며 거룩한 성지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소서. 그리고 새남터에서 피어난 장미꽃들을 보면서 사형장에 피어난 성모님의 마음을 저들도 알게 되어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소서!’

기도만큼이나 장미꽃을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전정 작업을 하던 어느 날! 그 전날 불어댄 심한 바람 때문이었을까, 가지 하나가 ‘ㄱ’자로 꺾여 있었고, 그 가지 끝에는 작은 꽃 몽우리 하나가 달려 있었습니다. 여러 장미 나무를 전정을 해야 하기에 전정하는 동안 ‘ㄱ’자로 꺾인 이 가지도 그냥 잘라 버릴까 하다가 문득,

‘저 가지도 장미꽃 한 송이 피우려고 애를 쓰는데 가만히 놔 둬 보자. 영양 공급이 안 되어서 가지가 마르면 그때 다시 전정을 하지.’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성지 마당을 산책하며 나무들과 장미꽃을 살피는데, 글쎄 ‘ㄱ’자로 꺾인 줄기 끝에 맺혔던 작은 몽우리가 어엿한 크기의 장미꽃이 되어 꽃잎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가지가 꺾어져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기가 어려웠을 터인데, 가지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헌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마침내 백장미 한 송이가 꽃잎을 피웠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내 가슴마저 멈칫-했습니다. 그 때의 느낌이란! 지금까지 핀 모든 장미꽃들 보다 더 하얀 빛을 발하는 꽃이었고, 꽃잎들 하나하나 노란색 꽃술 하나하나까지도 너무나 섬세하게 피었던 것입니다. 이후 사흘 동안 백장미 한 송이는 예쁘게 피어 있다가 운명처럼 꽃잎 하나하나를 땅에 떨구고 말라버린 후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보면, 꽃이 핀 흔적만 있고 ‘ㄱ’자로 꺾인 장미 줄기는 검게 변했습니다. 꺾인 줄기와 그런 상황에서도 꽃을 활짝 피운 백장미 한 송이는 마치 새벽이슬처럼 사라졌지만, 며칠 동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진심,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인 나도 꺾인 장미 줄기와 거기에 맺힌 작은 몽우리를 보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거늘! 그러다가 그 가지에서 핀 몽우리가 백장미로 변해가는 과정을 경외심을 갖고 가슴 설레며 봤거늘! 하물며 인간을 귀하게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러한 마음과 눈으로 보고 계시지 않을까!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인간이 별 볼일 없다고, 혹은 뭐 하나 잘하는 것이 없다고, 또는 인간적으로 외적 혹은 내적으로 뭔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를 쉽사리 외면하실 분일까!’

꺾인 줄기가 꽃을 피우려 헌신·노력하는 모습에서 마침내 아름다운 백장미가 피어난 것처럼, 우리 또한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 ‘헌신’과 ‘노력’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해 주시지 않을까요? 그날, 자연에서 얻은 교훈은 나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