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미안합니다 / 신혜솔

신혜솔(안나) 시인
입력일 2020-08-25 수정일 2020-08-25 발행일 2020-08-30 제 320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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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지나간 날들을 돌이키며 신중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결이 고운 삶을 유지하자,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 간절해지기 시작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그중 하나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 이다.

며칠 전 오래된 사진 파일을 정리하면서 그 사진을 또 보았다. 볼 때마다 밀려드는 안타까움은 내 불찰로 인한 내 몫일 수밖에 없다. 사진 속 주인공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축구장에서 만난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다. 10년이 넘은 사진이지만 컴퓨터 안에서 어제 찍은 사진처럼 웃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은 마치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엄지를 척 올리며 운동장 쪽을 등지고 관중석에 서 있었다. 내가 왜 이 사진을 찍어야 했을까.

나는 아들과 함께 스페인을 여행 중이었다.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전이 레알 마드리드 경기장에서 한다는 정보를 들었고 우리는 어렵게 표를 구해 입장을 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관중과 세계 스타 선수들이 다 모인 팀의 홈구장이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흥분한 아들은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고 나는 그런 아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마구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다가 우리 앞줄에 있는 두 부자를 발견했다. 그들은 서로 포즈를 한껏 취했지만, 사진이 찍히지 않는지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방전된 카메라가 아니었을까.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는 그들이 안쓰러워질 즈음 경기장으로 선수들이 입장을 시작하고 관중들의 함성은 커졌다. 그 부자가 기념사진 한 장 못 찍고 자리에 앉아야 하는 순간의 실망스러운 표정은 내 오지랖을 건드렸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보여주며 사진을 찍어줄 테니 아까처럼 포즈를 취하라고 했다. 건장한 청년인 아들과 작고 인자하게 생긴 아버지는 어깨동무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그리고는 활짝 웃었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그들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메일주소를 적은 쪽지를 내게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나도 행복할 만큼 받았던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많은 인파 속에서 빠져나오느라 그들을 보지는 못했다. 숙소로 돌아와 바로 사진을 보내 주려고 컴퓨터를 작동시켰는데 중요한 건, 이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가 없지 무언가. 카메라 가방과 배낭, 코트 주머니, 샅샅이 뒤지고 털어도 쪽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들은 몇 날 며칠을 내게서 메일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차라리 모른 체하고 말 것을…. 이 일로 나는 고해성사를 보기도 했다.

매년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할 때면 생각나는 일이다. 미안한 이 마음을 어디로 보내야 할까. 결국, 나에게 미안해하기로 한다. 침착하지 못해서, 신중하지 못해서, 쓸데없는 것들이 넘쳐서 미안하다. 그리고 부족한 것 많아서 또 미안하다. 기도가, 믿음이, 친절과 배려가 말라 있어 미안하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은 것도 겸손은 부족하고 의욕은 넘쳐서일 것이다. 그게 바로 나였다.

이젠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 예의상 하는 빈말도 함부로 하면 공해가 된다. 불필요하게 넘치는 것들을 정리하며 공해를 줄이고 부족한 마음의 양식을 채우기 위해 나는 나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한다. 해마다 시작만 하고 끝도 못 맺었던 성서 필사부터 생각을 바꾸었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시편만 쓰고 있는 요즘, 그래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

내 의욕으로 인해, 내 오지랖으로 인해, 내 교만으로 인해 실망하고 상처받았을 모든 누군가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혜솔(안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