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저 수고로운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김형태 변호사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0-07-21 수정일 2020-07-21 발행일 2020-07-26 제 320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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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연분홍, 분홍, 선홍, 연보라. 이틀을 꼬박 내린 장맛비에 형형색색 봉숭아꽃들이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지나던 할머니가 열린 대문 안으로 우리 집 마당을 들여다보고는 “야, 봉숭아 정말 오랜만에 본다”며 탄성을 냅니다.

청량리 밖 변두리 우리 동네는 버스 다니는 큰길 옆에도 3층 건물이 제일 높았고 집집마다 조그맣게라도 마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십수 년 사이 지하철 환승 역세권이 되면서 대로변은 10층 넘는 빌딩들이 온통 하늘을 가리며 들어섰고 동네도 원룸 건물들로 싹 바뀌어 장미며 분꽃 피던 마당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단독주택이라곤 우리 집 하나 달랑 남아 주변 고층 건물들에 온통 포위된 형국입니다.

동네 부동산 아저씨는 골목길에서 우리 노모를 만나면 그 아까운 땅을 왜 놀리느냐고 건축업자에게 팔든지, 원룸 올리라고 성화입니다. 방이 스물댓 개면 월세 수입이 1000만 원이라니 이 뿌리치기 어려운 돈의 유혹에 동네 마당들도, 꽃들도 사라진 겁니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깨 창밖을 보면 주변 원룸들에는 여기저기 불이 환히 밝혀져 있습니다. 밤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걸까. 컴퓨터게임이라도 하는 걸까. 그리고 아침이면 현관 앞마다 먹다 남은 배달 음식들이며 포장용기, 페트병, 일회용품 쓰레기들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저렇게 저마다 방 하나씩 꿰차고 들어앉아 홀로 컴퓨터 화면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거 말고 방 하나에서 온 식구가 부대끼며 살아가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골목에 뛰놀던 그 많던 아이들은 또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땐 엄마들이 장바구니 들고 시장 가서 고등어며 콩나물 사다가 집에서 밥해 먹던 때였으니 쓰레기들이 저렇게 산더미처럼 나올 리도 없었지요.

그렇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면 아까운 알미늄 캔 하나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됩니다. 경제학에서는 그게 재활용되고 캔을 만드는 과정에서 노동력에 대한 임금이 지급되며 자본가에게는 이윤이 발생하니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강변합니다. 하지만 전부가 재활용되는 건 아니며, 만들고 공급하는 과정에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이산화탄소 등 각종 공해가 발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겨우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알미늄 캔 하나를 쓰레기로 만드는 건 정말로 낭비요 탕진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는 없으니 이런 탕진에 대해 우리 후손들이 대가를 치르겠지요.

우리 세대는 당대 안에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내 처는 서울 가까운 여주 출신인데도 중학교 때까지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했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에 있는 외손주 녀석과 국제통화료도 안 내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으니 그새 이뤄진 ‘발전’이란 정말 괄목상대입니다. 그러는 동안 마당 있는 집들이 다 사라지고, 가족들이 흩어져 1인 가구가 대세가 되고, 온라인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밀어내고, 연대보다는 저마다의 자기주장만 세상에 가득합니다.

여름 휴가철이면 사람들은 비행기 타고 전 세계 온 하늘을 휘젓고 다닙니다. 저 무거운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려니 기름은 얼마나 들어갈 것이며 그 타고 남은 시꺼먼 연기는 또 얼마일까요. 그래도 우리는 내 눈을 즐겁게 하려고 열심히 이 짓을 합니다.

‘발전’이란 결국 돈이 많아지는 거고 그 돈은 나의 편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니 발전은 대체로 우리의 이기적 속성을 북돋우는 쪽으로 가게 돼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성과 자아도취를 거부하는 자기 초월의 근본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모든 관심의 바탕이 됩니다…이제는 근대성의 신화, 곧 개인주의, 무한한 진보, 경쟁, 소비주의, 규제 없는 시장에 대한 비판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지닌 ‘발전’의 유혹을 떨쳐 내고, 나 홀로 자유로운 원룸 대신에 식구들 한데 모여 오글거리는, 마당에는 봉숭아 꽃 피는 그런 집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에너지 펑펑 쓰는 문명의 이기들이나 일회용품들이 주는 이기적 편리를 접고 ‘발전’ 이전의 저 수고로운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