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모님의 영성 따른 성인들

이재훈 기자
입력일 2020-04-27 수정일 2020-04-28 발행일 2020-05-03 제 3193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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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기도하고 인내하며 이웃 위해 헌신하는 삶 살아
성녀 모니카 - 간절한 기도로 가족 모두 바른 길로 인도
성 요한 보스코 - 청소년과 소년 노동자 위해 한평생 헌신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 -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모 영성 실천

카를로 마라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5월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하는 성모 성월이다. 이 시기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하던 성모님의 삶과 그 영성을 기리고 있다. 성모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하며 매 순간 고통을 인내해왔다. 또한 그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항상 이웃을 위해 돌아볼 것을 일깨웠다.

현재 교회 공동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다. 성모님의 영성을 따라 살아온 성인들의 삶을 통해 평범한 일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현실을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의 표현처럼 ‘생각의 시간’이자 이웃과 가족 간에 ‘사랑의 시간’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돌아본다.

성녀 모니카

■ 성가정 이룬 성녀 모니카(332~387)

모니카 성녀는 교회에서 ‘경건한 자모의 거울’이라 불린다. 모니카 성녀의 성모 영성은 우선 ‘자애’에서 나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도를 위해 성당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라 병중에 있는 빈민에게는 따뜻한 동정의 손으로 자신이 먹을 것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줬다.

가정 안에서 모니카 성녀는 인내와 헌신의 성모 영성을 보여줬다. 이교도이자 로마 하급 관리인 남편 파트리키우스와 매사 본인을 괴롭히던 시어머니를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남편과 시어머니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스레 모셨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남편과 시어머니가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젊은 시절 이단 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하고 이교철학을 연구하는 등 윤리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다. 모니카 성녀는 방황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 30년 간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죄를 보속하는 청원기도’를 바치는 헌신과 희생을 보여줬다. 이러한 모니카의 헌신과 정성에 감화된 성 아우구스티노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 안에 살아가는 이가 됐다.

모니카 성녀의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은 남편과 아들로써 하느님의 응답을 받았다. 모니카 성녀의 성모 영성은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우리에게 간절함과 인내, 헌신을 통해 이 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성 요한 보스코

■ 청소년들의 성인 요한 보스코(1815~1888)

성 요한 보스코는 살레시오회 창립자이자 사제이며 교육자였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가난하지만 깊은 신앙을 지녔던 가정 안에서 자라 근면한 노동 정신과 의무 수행을 통한 순종의 덕, 하느님의 현존 앞에 솔직한 태도, 감사와 기쁨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웠다. 이렇듯 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모의 영성을 몸에 익힌 그에게 ‘성모님은 언제나 함께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이며 살아계신 스승이자 어머니’였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교육자로서 성모님의 영성을 본받아 당시 이탈리아에서 산업화 현상과 통일 운동의 혼란기로 인해 발생하는 방황하는 청소년과 전쟁고아, 소년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주일학교를 열어 이들에게 배움의 공간을 제공하고, 가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기숙사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를 열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헌신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자립시설 ‘돈보스코 직업학교’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이어지고 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성모 영성을 통한 가족정신을 바탕으로 청소년들과 함께 살고 믿어주며 우정 어린 현존을 중시하는 ‘예방 교육법’을 실천했다. 그는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기초로 교육자들에게 ▲균형 잡히고 합리적인 이성 ▲자발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종교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자애를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그의 교육사업과 그 성과를 많은 이들이 칭송할 때마다 자신은 “성모님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며 성모님께 공을 돌렸다. 또한 임종의 순간까지도 “한평생 성모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청하며 제 소임을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굳건한 성모 신심을 보여줬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

■ 자신을 내어준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1910~1997)

‘엄마(Mother)’로 불렸던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이하 마더 데레사)는 인도 콜카타에서 평생을 가난과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로레토 수녀회’에 몸담았던 1946년 9월 10일 피정을 위해 다르질링으로 가는 열차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소명을 듣고 콜카타의 빈민촌에서 헌신하고자 거리로 나섰다. 이후 마더 데레사 수녀는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임종의 집·빈민 학교·병원·한센병 환우 수용소 등을 운영했다.

마더 데레사 수녀의 성모 영성은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며 가장 큰 힘을 준 예수회 출신 페레에 대주교에 보낸 편지에서 보인다. 그는 편지에서 “빈민가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하며 성모님의 이름으로, 그 분의 영광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편지 속 요청대로 ‘사랑의 선교 수녀회’의 설립 목표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봉사하는 것 ▲가장 버림받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정하며 이를 실천하는데 앞장섰다.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 성모님은 평생의 동반자였다. 고통을 인내하며 이웃을 돌아보던 마리아처럼 스스로 가장 낮은 곳을 찾아 그 안에서 자신을 기쁘게 내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함께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이들이 굶어죽는 것은 우리가 나눠주길 원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고,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함께 나누는 고통을 통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청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1997년 9월 5일 콜카타에서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기 전까지 인내와 자비의 성모 영성을 실천하며 “당신과 나 바로 우리가 교회”라며, 우리 스스로가 주위를 둘러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