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0-03-17 수정일 2020-03-17 발행일 2020-03-22 제 318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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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제1독서(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 제2독서(에페 5,8-14) 복음(요한 9,1-41)
‘파견된 이’ 예수님에 대한 순종으로 치유된 눈먼 사람
박해 속에도 체험에 대한 확신으로 ‘예언자’라고 고백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증언 
진정한 신앙은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굳게 믿는 것

빛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부활을 향해 순례 중입니다. 화답송 시편에서 하느님은 두려워하는 시인을 위로하시고 희망을 불어넣으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서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시편 23,1-2)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 9장 이야기 배경은 유다 축제 초막절입니다.(7-8장) 초막절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을 안내자로 삼아 가나안으로 행진한 것을 기념합니다. 이 시기에 많은 등불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 가정을 밝힙니다. 사람들은 환한 등불을 보면서 주님이 빛이자 안내자로서 광야를 통과하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이 자리에, 교회와 성사 안에 이미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얀느의 ‘맹인의 치료’(1686년).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은 성전 밖을 ‘지나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십니다. 이름 없이 ‘그 사람’으로 자주 소개되는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먼 이가 먼저 예수님 시선을 받고 그분이 세상의 빛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하는 귀한 도구로 선택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눈으로 적합하게 보이지 않는 이, 작은 이를 선택하신다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다윗의 부르심 이야기도 선택에 대한 구약 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눈먼 이를 치유한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먼 이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합니다. ‘침’은 유동적이면서도 내밀한 것으로 예수님의 침은 높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진흙을 개는 행위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창조를 연상시키는데(창세 2,7) 여기에서는 새 인간창조와 연결됩니다. 이 행위가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한다는 것이 본문에서 반복되는데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을 위반한 죄지만 눈먼 이와 예수님에게는 안식일의 궁극적 목적,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왜 요한이 실로암의 뜻을 히브리어로 ‘파견된 이’라고 번역할까요? 눈먼 이가 치유된 것은 실로암 물 때문이 아니라 ‘파견된 이’, 곧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했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칭호는 아버지가 파견하신 아들입니다. 예수님 생애 전체는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말씀을 경청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환상과 상상, 막연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기 눈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구해낸 분의 이름을 ‘예수님’(‘주님이 구원하신다’)이라고 부릅니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이웃과 지인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그 사람을 데려갑니다. 바리사이들은 질문합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요한 9,17) 눈먼 이로 태어나 율법을 읽을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 길바닥에서 구걸하며 평생 살아 온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 ‘체험’, 일어난 사실 뿐입니다. 박해하는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나를 치유한 분이 정말 나에게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둠과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집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확신도 자랍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예언자’라고 대답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생각하듯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 아니라 예언자, 하느님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분, 하느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그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에페 5,8)으로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데려가는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가 보게 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요한 9,18) 그들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겪는 유혹을 직시하게 합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상의 경계와 혼동합니다.”(철학자 쇼펜하우어, 1788-1865) 명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자세는 조롱, 완고함, 무관심, 자기 확신에 대한 맹신, 때로는 오만한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자기 경배’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부모를 불러서라도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자기들 생각을 입증하고 싶지만 실패하자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들의 권위가 무너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참으로 모순입니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강요하는 그들이야말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 5,44)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이 한 마디에 요약됩니다. “당신들은 듣지 않는 사람들이군요!”

■ 주님, 저는 믿습니다

자기 체험과 판단에 바탕을 두고 예수님을 용기 있게 증언한 사람은 그 대가로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당하는 스승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고 고백하고 경배합니다. 그 사람의 단계적인 신앙 여정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이 체험한 분, 자신이 말하고 있는 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가르치는 표징입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제 영을 눈멀게 하는 온갖 종류의 어둠과 유혹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오늘 저에게도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명령하십시오. 아멘.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