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52. 예수님과 성전

전삼용 신부rn(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19-12-30 수정일 2019-12-31 발행일 2020-01-05 제 317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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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583~586항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만이 하느님의 성전 된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확신
그 확신대로 자비 실천한다면 주님 모시는 ‘성전’ 될 수 있어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자 이 학교에서는 성탄 연극에 등장할 배우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랄프라는 4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랄프는 선천적인 말더듬이었고, 판단력도 보통아이들보다는 뒤지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다른 누구보다도 연극을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연극을 시키기로 하였고, 단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여관주인 역할을 시켰습니다. 세 번, “방 없어요”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되었고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자 랄프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요셉이 방을 찾고 있다고 하자, 여관 주인은 또박또박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그럼 큰일이네요, 날도 추운데 제 아내가 언제, 어디서 아기를 낳을지 모르겠거든요”라고 감정을 넣어서 말했습니다. 여관 주인은 조금 망설이더니 역시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한 번 더 “정말 큰일입니다. 이번이 마지막 여관이었는데…”라고 말하자, 랄프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더듬으며 말합니다.

“그,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연극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라는 한 마디 때문에 숙연해졌고 따뜻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욕심이 사라지고, 어려운 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마태 25,40.45) 가난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성전’이 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장사하는 집’이 됩니다. 어떤 집이 되어야 영원할 수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오갈 데 없는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를 모신 성전이셨습니다.(586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성전에 대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을 두고”(요한 2,21) 성전이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요한 2,15) 그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강도들의 소굴이 된 성전을 참 하느님의 집으로 만들기 위함이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고 “강도들의 소굴”, 혹은 “장사하는 집”이 되는 이유는 인간 안에서 강도들을 쫓아낼 수 있는 ‘채찍’이 없기 때문입니다. 채찍은 자신의 욕구를 버리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흘리는 피 때문에 자녀들이 자신의 욕구를 접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듯,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어 자기 자신의 뜻만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 욕심이 사라져 가난한 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겼기에 선악과로 자신을 채우려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원죄를 지니기에 하느님의 율법인 이웃사랑을 지킬 능력을 상실합니다.(578항 참조)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어린양으로 만들어 우리 죄를 속량하여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하셔야 했습니다.(580항 참조) 하느님을 자비롭게 여겨야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율법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로 우리를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만이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위의 랄프처럼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까지 받아들이는 참 성전이 됩니다.

전삼용 신부rn(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