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인천 영종본당 김현남씨, 26년째 성가대 지휘자…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셔”

김현정 기자
입력일 2019-12-30 수정일 2019-12-31 발행일 2020-01-05 제 3177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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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전 잠시 봉사하려다 한결같이 교중미사 봉사
평일미사 반주도 도맡아
“성가대 단원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중요한 약속”

만 26년간 인천 영종본당 바르나바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해 온 김현남씨는 “가족의 도움과 하느님의 은혜로 오랜 시간 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악을 전공한 젊은 새댁은 유학 가기 전 잠시 머무를 요량으로 낯선 곳에서 미사 반주자를 맡게 됐다. 밤하늘은 촘촘한 별밭이었고, 배가 떠다니는 아름다운 시골마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만 26년.

아름다운 시골마을은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신도시로 바뀌었지만 어느새 중년이 된 새댁은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인천 영종본당 주일 오전 11시 교중미사에서 봉사하는 바르나바성가대 지휘자 김현남(클라라·54)씨가 사연의 주인공이다.

“처음 영종도에 이사 왔을 때엔 몇 명 안 되는 성가대를 수녀님이 지휘하고 계셨고, 제가 반주를 하게 됐어요. 그러고 1년쯤 지난 뒤 수녀님께서 이동 발령을 받으시면서 제게 지휘를 부탁하셨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교중미사 지휘를 해 왔습니다.”

첫 아이가 생기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김씨는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영종도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피아노를 부전공으로 한 김씨는 음악학원을 운영 중이다. 레슨 때문에 바쁜 그이지만 성가 연습이나 주일미사 지휘를 빠진 적은 세 아이를 낳았을 때와 양가 부모님이 선종하셨을 때 외에는 없다. 게다가 20년 이상을 무급으로 봉사했다.

“작은 섬이다보니 인적 자원이 부족해 반주자가 없을 때엔 제가 반주를 하고, 지휘 없이 미사를 드리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었죠. 평일미사 반주의 절반 정도를 혼자 감당해야 할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김씨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넉넉지는 않지만 뭔가 필요할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채워 주시는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껏 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어요. 미사에 참례해야 하니까 주일마다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요.”

김씨는 가족이 함께했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늦깎이로 첼로를 전공한 남편은 10년 전부터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늘 든든한 조력자가 돼 줬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곧 독일유학을 떠나는 큰아들도 틈날 때마다 본당을 찾아 노래 봉사를 했다.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바뀌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성가대 또한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신자 수가 늘면서 처음에는 작은 공동체였던 성가대원의 숫자도 덩달아 늘었지만 많은 이들이 봉사를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과 달리 개인사정으로 연습에 빠지거나 미사에 불참하는 형제자매가 많아져서 안타깝습니다. 성가대 단원이 된다는 것은 동호회나 친목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 우선이 돼야 할 아주 중요한 약속이지요.”

또한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이니 만큼 이런저런 힘든 일들도 종종 있다.

“가끔 인간관계나 갈등 때문에 성가대를 탈퇴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럴 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모두가 미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과의 사랑을 체험하며 성가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씨는 성가대 봉사에는 여러 미덕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능력을 조금씩 절제하는 겸손, 모난 것을 깎아내야 하는 자기성찰, 옆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서로 맞춰가는 배려, 아름다운 성가를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기도가 바로 성가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가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길 바라는 것이 김현남씨의 바람이다.

김현정 기자 sophia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