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기적도, 부활도 ‘마음’이다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rn전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일 2019-12-24 수정일 2019-12-24 발행일 2020-01-01 제 3176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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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가을엔 수선화와 튤립 구근 몇 개를 사다 심었다. 새봄을 기다리는 상징으로서.

서울 도심 주택가의 구석진 귀퉁이, 조그만 꽃밭. 언 땅속에서 이들은 죽은 듯이 혹한을 견뎌내고 찬바람이 물러가면서 청초하고 또 화사한 꽃을 피울 것이다. 그들은 겨우내 내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작은 희망이다. 나는 마치 남몰래 금은보화를 묻어놓은 기분이다.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가 화근이 돼 죽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그와 장미에 얽힌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릴케의 젊은 시절, 한때 알고 지낸 여자 친구와는 정해진 일과가 있었다. 아침에 여자 친구가 릴케의 집을 방문하면 함께 집주변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이다. 그들의 산책로 한 지점에는 언제나 걸인 노파가 앉아있었다. 이 노파는 언제라도 얼굴을 드는 법이 없었다. 한결같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 푼 적선을 바라며 앙상한 두 손만 내밀었다.

두 사람이 그 노파 앞에 당도하면 언제나 여자친구는 동전 한 닢을 노파의 손에 떨어트렸다. 여자친구가 어느 날 릴케에게 말한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자비심이 없지요? 한 번도 불쌍한 노파에게 적선하는 적을 본 적이 없어요.”

그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책길에 나선다. 헌데 릴케의 손에 빨간 장미한 송이가 들려있다. 여자친구는 당연히 자신에게 주려나보다 하고 기대했지만 릴케는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인노파 앞에 당도했을 때, 릴케는 허리를 숙여 노파의 두 손을 잡는다. 그리고 장미를 노파의 손에 꼭 쥐어준다.

그 순간,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번도 고개를 드는 법이 없었던 노파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릴케와 눈이 마주친다. 미소 짓는 릴케가 노파의 두 손을 잡아 천천히 일으키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포옹을 한다. 노파의 주름진 뺨이 홍조에 물들고 침침했던 두 눈은 샛별처럼 빛났다.

무엇이 이렇게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었을까. 릴케가 손에 든 붉은 장미에 기적을 부르고 마술을 부리는 힘이 있었던 건 아니다. 장미는 단순한 상징에 불과했다.

‘아름다운 사랑’ 또는 그러한 사랑의 고백을 주로 상징하는 장미를 받는 순간, 걸인 노파는 장미의 미적 감동과 함께 그 상징성을 타고 사람을 사랑하는 릴케의 따뜻한 마음이 전류처럼 온 몸에 전해졌던 것이다.

상징의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의 간절한 의지와 염원이 개입할 때에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나의 수선화도 릴케의 장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또는 돈을 벌기 위해 아들이 서울로 떠나간 가난한 홀어머니. 교회나 절에 바칠 돈이 한푼도 없어 매일 새벽, 동구밖 고목 앞에 정한수 한그릇을 바치며 빌고 또 빌었다. 가령 그 아들이 성공했다고 하자. 상징에 불과한 고목이나 정안수가 무슨 묘수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힘이 있었다면 홀어머니의 지극한 기도와 정성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 쓰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오직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늘상 가까이 모시는 십자고상이나 묵주, 성체와 성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게 하는 성물로서 신앙심에 큰 힘을 미치지만 이들도 하나의 상징이다. 우리 마음이 진실되지 않다면 아무리 성물에 기댄들 성물은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 성물은 단순한 나무와 금속 재료의 형상물, 또는 단순한 떡이나 술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삿된 마음, 거짓된 마음으로 상징에 매달릴 때 그 상징은 금송아지, 즉 우상이 되고 그 믿음은 미신이 된다. 말끝마다 ‘예수님, 예수님’하고 또 ‘신부님, 신부님’하면서도 그 마음이 예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눈앞의 상징인 교회 체제에 복종할 뿐이라면 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적도 부활도 오직 마음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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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이냐시오)rn전 경향신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