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11-26 수정일 2019-11-26 발행일 2019-12-01 제 317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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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일본 등에서 10만여 명 선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작품.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수많은 역경과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성인이다.

성인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나 파리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예수회 설립회원 7명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러나 성인이 처음부터 이냐시오 성인과 함께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냐시오 성인의 뜻에 반발했다. 그러나 성인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는 성경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1541년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받고 동인도로 파견됐다. 성인은 인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인도 중서부의 ‘고아’라는 도시에 도착한 성인은 병자와 죄수들을 돌보고, 현지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을 펼쳤다. 그리고 인도에 정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들을 바로잡는데 앞장섰다. 이후 인도 남단의 타밀나두에 있는 코모린 곶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수천 명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인도만이 아니었다. 1545년 9월에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를, 1546년 1월에는 뉴기니와 인접한 몰루카 제도를, 또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섬을 찾아 열렬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히 성인은 말라카에서 일본인을 만났는데, 이때 일본 선교도 결심하게 됐다.

성인은 1549년 8월 일본 가고시마를 방문했다. 당시 일본은 그리스도교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성인은 더 많은 일본인들이 빠르게 교회의 가르침을 알 수 있도록, 일본어를 배워 교리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히라도, 야마구치, 교토 등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도시의 영주들을 만나 서양의 문물과 함께 교리를 전했다. 성인은 동시에 거리에 나가 자신이 번역한 교리서를 낭독하고 설교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접한 일본인들은 성인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본에 최초의 성당이 마련됐고, 복음이 빠르게 전파됐다.

성인은 1551년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가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그러나 성인은 중국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552년 중국을 향해 떠나는 여정 중 열병에 걸려 선종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종한 당시 성인의 나이는 46세였다.

성인은 비록 선종했지만, 성인이 수많은 지역을 선교하면서, 예수회 본부에 보낸 편지들은 당시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성인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거리를 이동하며 수많은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성인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은 이들의 수만 10만 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런 성인의 발자취에 성인은 흔히 바오로 사도에 비견된다.

제1대리구 고색동·발안·상현동본당과 제2대리구 목감의 주보성인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