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시담정 뜰이야기 / 지시연

지시연(체칠리아)시인
입력일 2019-11-19 수정일 2019-11-19 발행일 2019-11-24 제 317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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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정취가 뜰 안 가득히 내려앉았다. 서리가 내려도 끄떡없이 피어 있는 청화쑥부쟁이 곁으로 갔다. 부전나비는 햇살 옷을 입고 여전히 꽃잎을 오가며 꽃술을 부빈다. 뒷산에서는 낙엽송이 쏜살같이 바람 타고 노오랗게 날린다. 며칠 사이 변색한 사마귀는 무거운 몸을 뒤척이며 마루까지 올라와 걸어가고 뜰 안 여기저기 시든 꽃대로 서 있는 생명들은 제 몸 추스르기에 차분해졌다.

나는 40대 초반 이곳 시담정에서 내 시 창작의 산실을 가꾸며 15년을 살아왔다. 도시를 떠나 선택한 자연의 삶은 거저 주어지는 일상은 아니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참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주었다. 전원시인이라 자칭하며 호미를 들고 밭에서 가꿀 수 있는 것들은 조금씩 다 심어보았다. 채소를 가꾸고 꽃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그토록 원했던 흙 내음 맡으며 사는 일에 저절로 힘이 났다.

사람은 자연스레 아주 적게 보아도 꽃들과 새들과 다람쥐와 심심찮게 살았다. 이곳에 살면서 다섯 권의 시집이 출간되었고 나의 신앙도 삶도 산나물이 자라듯 어린 주목이 자라듯 자연에 온 정신을 맡기고 살았다. 자연의 품은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게 했고 때로는 고요하게 어느 날은 육신에 땀과 노동력을 과하게 실어가며 대자연이 주는 일상을 부단히 감사하며 살아보려 했다. 그러다가 4년 전 8월, 남편의 권유로 원주교구 성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가톨릭 전례에 관한 전반적인 공부와 그레고리오 성가, 다성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기회를 만난 것이다.

30여 년 성가대 활동을 해 왔지만 성음악원에 입학하여 모든 교과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기쁘고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1학년 때에는 라틴어 시간에 라틴어 발음을 배우고 성호경을 라틴어로 하면서 3년간 결석도 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2학년부터는 ‘엠마우스성음악합창단’에 입단하여 그레고리오 시편창과 전례곡들을 배우며 더 깊은 의지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한편 다성음악을 동시에 배우면서 ‘엠마우스성음악합창단’ 연주회를 2회 참여하고 나니, 지나간 시간들이 더 없는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3년 과정 중에 지휘와 오르간도 배우며 음악적으로 부족한 나를 성장시켰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이런 모든 노력이 기도로 연결되어 적지 않은 나이에도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마음 속 깊은 평화를 안겨주었다.

아침나절 마을 어귀에 배추밭을 지나다 달팽이를 만났다. 달팽이가 느리다고 단정하는 건 순전히 나의 뾰족한 시선일 뿐, 달팽이는 달팽이의 속도로 가고 있는 것이지 잘못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달팽이가 기어간다고 해서 나를 방해하진 않았지만 달팽이는 나의 무심한 발걸음에 생을 마감하더라. 누가 누구를 가속으로 떠밀 수 있는 게 잘난 생이라면 애초부터 인간은 걸어서 태어났나? 묻기도 하며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제 오늘 이틀간 힘들지만 마른 꽃대를 자르고 나도 생명들도 휴면에 든다.

그리고 맞이한 위령성월! 햇살 한 줌도 그지없이 달콤한 시절이 왔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생명을 가르쳐준 엄마는 나의 시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랑이다. 지금도 학교 갔다 돌아와 “엄마”하고 부르며 뛰어 들어갔던 기억이 퇴색하지 않은 건 신기하다. 설국이 피고 내 그리움도 향기가 되어 눈가를 적신다.

천국에서 지켜보고 계실 사랑의 우주 ‘엄마’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시연(체칠리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