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지에서 만난 순교자] 3. 제물진두순교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9-17 수정일 2019-09-18 발행일 2019-09-22 제 316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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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복음화의 관문에서 순교 영광 누리다
인천, 바닷길로 한양에 이르는 관문
사람 왕래 많고 서양문물 유입되는 제물진두에서 순교자 10위 공개처형
선교사 입출국의 요지로 주목하며 블랑 주교, 1889년 제물포본당 설립

인천항, 월미도,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천역 인근에는 인천하면 떠오르는 숱한 관광지가 많다. 그러나 이곳에 많은 순교자들이 난 순교성지가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한중문화관에 다다르면 작지만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제물진두순교성지(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40)를 만날 수 있다.

■ 천국을 향한 좁은 문

큰 건물도, 멋진 경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치 부드러운 천 두 장이 살포시 감싼 듯한 성지 성당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쩐지 포근함이 느껴지는 성당의 모습이 순교자들을 감싸 안는 예수의 손을 형상화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십자가 아래로 손을 내밀고 있는 성지 입구의 십자가상은 순교자뿐 아니라 모든 순례자들에게 열려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 서울을 향한 관문의 역할을 해온 곳이다. 그래서 조선초기부터 이 문을 지키는 수군기지 제물량(濟物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형성된 제물포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외국과 우리나라를 잇는 ‘문’이었다.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이 제물량에 자리한 나루(津頭), 제물진두는 늘 하느님을 향해 있었던 순교자들의 문이기도 했다.

틈새처럼 보이는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10위의 순교자들의 성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이라 했던가. 성화에 묘사된 순교자들은 이 제물진두에서 하느님을 향한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이 제물진두가 순교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곳이 ‘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바닷길로 한양으로 이르는 관문인 이곳 인천지역에서 서양 세력의 침공이 있었던 만큼,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의미로 인천지역에서 ‘서학을 신봉하는’ 천주교신자들을 처형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나루터, 곧 제물진두가 공개처형지로 적합했다.

■ 제물진두에서 하늘나라 문을 연 순교자들

성당에 들어서니 하늘에서 색색의 빛을 뿌리는 듯한 십자 형태의 유리화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성당 벽에는 제물진두의 순교를 표현한 대형 성화가 걸려있다. 도끼로 처형당하는 순교자의 모습과 순교 후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순교자들의 모습이다. 제물진두는 이곳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에게 하늘나라를 향한 문이었다.

“이 때를 당하였으니, 정신을 잃지 말라.”

“영감도 정신을 잃지 말라.”

1868년의 어느 날, 넙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하는 손 베드로가 제물진두에 이르러 아내 김씨를 일깨우며 말을 꺼내자, 김씨 역시 남편을 격려하며 말했다. 죽음 앞에서 서로를 격려한 말은 ‘정신을 잃지 말라’였다. 부부는 서로의 격려 속에 순교의 그 순간까지 하느님을 바라는 그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각각 서울 애오개와 청파 태생인 부부는 훗날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것으로 유명한 박순집(베드로)의 이모와 이모부다. 김씨는 예비신자로 1823년 손 베드로와 혼인하면서 단식과 금육을 지키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부부는 박해를 피해 부평으로 피신해 망건을 떠 생활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남편이자 부부의 사위인 백치문(요한사도)과 함께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들의 굳건한 신앙은 문초 과정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천주교를 믿다 지금 잡혔으니 물어볼 말도 없고, 대답할 말도 없다”고 말하며 신앙을 증거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가족 순교자들이 순교한 날 ‘이 마리아의 손자’도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제물진두에서는 1871년에도 가족이 함께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의 후손들이었다. 5월 6일에는 이승훈의 증손자인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가 처형됐고, 5월 18일에는 이승훈의 손자며느리인 정씨와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이명현이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날 백용석과 김아지도 함께 치명했다.

성지 정문에 위치한 ‘위로와 자비의 예수님상’.

성지 내 성당 벽에 걸린 제물진두의 순교를 표현한 대형 성화.

제물진두에서 순교한 10위의 성화가 걸려있는 성지 입구.

■ 선교사들의 문

사실 제물진두가 순교터가 되기 20여 년 전에도 제물진두를 찾은 순교자가 있었다. 바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다. 1844년 부제품을 받고 조선입국에 성공한 김대건 신부는 한양에 거점을 마련하고, 조선교회의 실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사제품을 받기 위해 다시 중국을 향할 때 거친 곳이 이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배 한 척을 구입해 ‘라파엘호’라 이름 짓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에서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조선교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물진두를 문으로 삼은 이는 김대건 신부만이 아니다. 제물진두, 제물포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고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개항 이후 제물포는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관문이었다. 제물포는 수심이 깊어 화물선이나 군선 등이 정박하는데 용이했다. 게다가 서울이 가까웠기 때문에 서구와 조선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개항 이후 자유롭게 조선에 출입할 수 있게 된 선교사들 역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을 했다.

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의 요청으로 온 조선의 첫 수녀들, 바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4명도 이곳을 통해 입국했다. 제물포가 선교사들이 입출국하는 중요한 길목이라는 점을 인지한 블랑 주교는 1889년 7월 제물포본당을 설립했다. 제물포본당은 현재 인천교구의 주교좌인 답동성당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