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콜카타의 데레사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8-20 수정일 2019-08-20 발행일 2019-08-25 제 315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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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 섬긴 ‘엄마’
빈자 위한 성소에 삶으로 응답
빈민가 살며 약자 돌봄에 헌신
산북·위례성데레사본당 주보

콜카타의 데레사.

“하느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나누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마’라 불리던 그 이름 ‘마더 데레사’. 인도 콜카타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세상에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데레사 성인은 “어떻게 가난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당신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서로 조금씩 나누면 된다”고 말했다,

성인은 1910년 8월 26일 오늘날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18세가 되던 해에 인도 콜카타에서 활동하던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입회했다. 성인은 수녀회가 콜카타에서 운영하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고, 학교의 교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성인이 가난한 이를 향한 부 르심을 받은 것은 입회하고도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피정을 위해 다르질링으로 향하던 성인은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성소를 체험한다. 성인은 후에 이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일컫었다.

성인은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부터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며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했다. 성인은 서양식 수도복 대신 인도의 전통복장인 사리를 수도복으로 삼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했다.

성인의 활동이 알려지자 학교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 성인의 뜻에 함께하는 이들이 모여 1950년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됐다. 성인은 수도회와 함께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고, 빈민가의 고아들을 위한 집,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집도 마련해나갔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성인의 사랑 실천의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1962년에는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파드마 쉬리 훈장과 라몬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특히 1969년 영국의 유명 언론인 말콤 머거리지가 성인의 활동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하자 세계의 많은 이들이 성인의 사랑에 감화됐다. 1971년에는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았고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몸을 더 낮추며 살았기에 고령이 된 후에는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수도회 총장으로서 세계 각국을 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졌다. 성인은 병에 걸렸을 때도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 달라며 병원 치료를 마다하기도 했다.

성인은 1997년 9월 5일 87세로 콜카타에서 선종했다. 2003년 10월 19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성인의 시복식을 주례했고, 2016년 9월 4일 같은 장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시성미사 강론에서 “마더 데레사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님의 자비를 너그러이 보여주셨다”면서 “그는 모든 이를 환대했고, 생명의 수호자가 되어 주었으며, 태아와 소외된 이, 버려진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고 전했다.

성인은 제2대리구 산북·위례성데레사본당의 주보성인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