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12) 바른 생각 ‘구사’(九思)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
입력일 2018-09-11 수정일 2018-09-11 발행일 2018-09-16 제 311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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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선 나 자신부터 바른 생각을
교만은 겸손, 인색은 은혜, 질투는 관용으로…
동양의 ‘구사’는 가톨릭교회의 ‘칠극’과 의미 통해

가족의 도리에 이어 가정의 예의에 대해 생각해본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고 했듯이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이를 아홉 가지 바른 생각인 구사(九思)라 했다.

첫째, 보는 데 있어서 밝음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에 가림이 없으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현실도 하나고, 상황도 하나다. 그러나 세상을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맑고 투명한 눈이 중요한 까닭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서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둘째, 듣는 데 있어서 총명을 생각해야 한다. ‘귀로 남의 잘못을 듣지 말아야 군자에 가깝다.’(「명심보감」 〈정기편〉)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생각대로 들으려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들으려 한다. 그리고는 한 쪽으로 치우쳐서 그릇된 판단을 하고 만다. 우리는 오늘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듣고자 하는가.

셋째,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삼강행실도」에 등장하는 노래자는 일흔 살이 됐지만,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 짓을 했다. 마루에 오르다 거짓으로 넘어져서 땅에 누워 어린아이처럼 우는 시늉도 했다. 노래자는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낯빛을 어린아이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의 온화한 낯빛은 부모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 모두를 기쁘고 온순하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넷째, 태도는 공손히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릇 자식이 된 자는 아랫목을 차지하지 않으며, 자리 한가운데에 앉지 않으며, 길 한가운데로 가지 않으며, 문 한가운데에 서지 않는다.’(「소학」 〈내편〉)는 말이 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다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이치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고 일렀다. 과연 우리는 공손함과 겸손함을 지닌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다섯째, 말하는 데 있어서 진실을 생각해야 한다. 대화는 상대방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인격을 나누는 행위다. 따라서 말에는 진심과 진실이 담겨야 한다. 오죽하면 ‘혀 아래 도끼 들었다.’는 속담이 있을까.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이요, 몸을 망치는 도끼다.’(「명심보감」 〈언어편〉)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책이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이다.

여섯째, 일하는 데 있어서 정성을 생각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정성을 다할 뿐 결과는 하늘에 달려있다. 과정은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비리와 부정을 부르고, 음모와 술수를 야기한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생각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24-34)라고 축복했다. 종종 기적을 바라는 우리는 지극정성과 간절함이 있는가.

일곱째, 의문이 있으면 물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논어」 〈위정편〉)라고 했다. 자공이 “공문자는 어떻게 시호를 문(文)이라 받았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는 일을 민첩하게 처리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불치하문(不恥下問)이 배우는 이들에게 금과옥조가 됐다. 오늘 우리는 인터넷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잠깐 본 것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덟째, 화가 날 때는 닥쳐올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적절하다. 예수님 역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경고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성내고 있는가.

아홉째,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 맹자가 양나라를 방문하자 혜왕이 “현자께서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어떠한 이득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맹자는 “왕께서는 왜 이득을 말씀하십니까?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득을 생각하면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재물 앞에서 얼마나 의로운가.

동양의 구사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기 위한 칠극(七克)과 다르지 않다. 교만은 겸손으로, 인색은 은혜로, 음란은 정결로, 분노는 인내로, 탐욕은 절제로, 질투는 관용으로, 나태는 근면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가톨릭의 일곱 가지 덕행과 나를 다스리는 구사의 미덕이 대동소이하다.

김문태 교수(힐라리오) 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