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전통 가정과 가톨릭 가정] (9) 조부모의 내리사랑, 자손의 치사랑 (하)

김문태(힐라리오) 교수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입력일 2018-08-21 수정일 2018-08-21 발행일 2018-08-26 제 310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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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주는 것도 사랑, 잘 받는 것도 사랑
내리사랑·치사랑 공존은 가정 융성하게 해
사랑을 받고 자란 자손은 다시 사랑으로 응답할 것

‘신체와 모발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 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효경」 〈개종명의〉)

사람의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부모의 육체는 조부모에게서, 조부모의 육체는 증조부모에게서 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육체는 선조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것이 된다. 공자는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다. 자식이 다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야말로 분신처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던 자식의 변고에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이므로 이보다 더 큰 불효는 없다.

이에 반해 효도의 끝은 입신양명이라 했다.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으로써 자신이 아닌 부모를 비롯한 선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어떤 이가 세상에 우뚝 서게 되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 사람은 어느 집안의 자손인가? 어떻게 키웠기에 그처럼 훌륭한 일을 했단 말인가?’ 하는 칭찬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을 주고 키워준 선조의 내리사랑에 대한 자손의 치사랑이 만들어낸 결과가 효도의 끝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의 하나로 장유유서를 들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엄격한 차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기」 〈악기〉에서 음악은 천지를 화합케 하고, 예의는 천지를 질서 있게 만든다고 했다. 예로부터 국가 차원에서 예악을 중시한 까닭이었다. 맹자는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본성으로 인의예지를 들었다. 어질고, 의롭고, 지혜로운 심성과 더불어 예의 바른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어른과 아이, 선조와 자손, 형과 아우 간에 차례가 있으므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질서 있게 유지되는 것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속담이 적절하다.

「맹자」 〈양혜왕 상〉에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를 만나자 왕 노릇하는 방도를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맹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공경하여 그 마음을 남의 아버지와 형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 아이를 사랑하여 그 마음을 남의 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면 천하를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집안에서처럼 밖에 나와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한다면 사회의 질서가 바로 잡히고,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간단하였다. 「동몽선습」 〈장유유서〉에 따르면 ‘천천히 걸어서 어른보다 뒤에 쳐져 가는 것을 공손한 태도라고 이르고, 빨리 걸어서 어른보다 앞서 걸어가는 것을 공손치 못한 태도라고 일컫는다. 어른은 어린 사람을 사랑하고,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젊은이를 업신여기거나 어른을 능멸하는 폐단이 없어져 사람의 도리가 바로 설 것이다’라고 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예의의 근본이자 세상이 바로 서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다.

경주에 12대에 걸쳐 300여 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이 있었다. 그 최부자집의 가훈이 인상적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삼 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욕심에 대한 절제가 묻어난다. 이러한 미덕은 내리사랑을 통해 선조로부터 자손에게 대물림되었고, 자손은 치사랑을 통해 그러한 선조의 뜻을 기리고 이어나가고자 했다. 잘 주는 것도 사랑이고, 잘 받는 것도 사랑이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공존은 온전한 사랑을 완성하는 한편, 가정을 융성케 하는 비결이 아닐까.

오늘날 조부모와 손자녀의 관계가 밝지만은 않다.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이나 일자리 등의 문제로 인해 조부모가 손자녀를 양육하는 소위 조손가정이 급격히 늘어가는 추세다. 통계청의 2016년 집계를 보면, 조부모와 미혼 손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가 42,819가구로 138,701명이며, 조부 또는 조모와 미혼 손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가 66,422가구로 149,198명이다. 3세대 가구가 아닌 ‘2세대 가구’로 분류된 조손가정은 조부모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정이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조부모와 손자녀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부모가 가정에 없으므로 애잔함과 아픔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조부모와 부모와 손자녀가 3세대로서 조화롭게 지낼 수 있을 때 온전한 내리사랑도 있을 것이며,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자란 자손도 훗날 치사랑으로 온전히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결손이 없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힘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때 ‘손자들은 노인의 화관이고 아버지는 아들들의 영광이다’(잠언 17,6)라는 말씀이 실감 날 것이다.

김문태(힐라리오) 교수rn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