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아는 것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5-01 수정일 2018-05-01 발행일 2018-05-06 제 309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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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어떤 분인지 알게 될 때 은총에 눈뜰 수 있어
나의 생각대로 아닌 객관적으로 주님 바라보는 것 중요
성경 읽고 묵상하며 그리스도 정체성 알고자 노력해야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깨달으셨습니까? 하느님을 잘 만나시고 함께 잘 지내셨어요?

결국에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더 잘 알아차리고, 새로운 은총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미 주고 계시는 은총을 순간마다 알아듣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은총으로 더 풍부해지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에서 하셨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는 말씀을 더 잘 알아듣게 됩니다. 이미 주어지고 있는 은총을 더 빨리 더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삶인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되겠죠. 가진 자가 더 받아 넉넉해지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은총이 이미 주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나마 은총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도 감각을 잃게 됩니다.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교회의 영적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 현존의 수련’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인간 영혼의 세 능력을 지성과 기억, 의지로 이야기하고 믿음, 소망, 사랑의 향주삼덕을 이 세 능력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상담심리학에서 인간의 내적인 심리자원을 이야기할 때 주로 인지, 정서, 의지(행동)의 세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무언가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인지의 영역, 감정과 관련한 정서 영역,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의 영역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해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세 영역 중에서 먼저 인지의 차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알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에 맞추어 아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실제로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나와 너 사이의 관계는 주체인 내가 자신 안에 만드는 상(像)에 의해 중개된다고 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떠오르는 내용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모습이나 내용이,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만들어진 그 사람에 대한 ‘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한 이러한 상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제공하는 정보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예상, 선입견 등과 또 내 자신의 내면 상태 등에 기초해서 이뤄지기도 합니다. 앞선 부분을 ‘인식의 객관적 기초’라고 이야기하고 뒤의 부분을 ‘인식의 주관적 기초’라고 이야기하죠.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어떤 면에서는 정말 그 사람이 어떠한지를 알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자기 멋대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식의 전이적 기초’라는 것도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알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죠.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와 비슷한, 과거에 알고 있던 사람이 떠오르고, 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가진 호감, 비호감 등의 감정이 지금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투영됩니다. 물론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선입견이라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가면서 달라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의 선입견이라면 중간에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알고 이해하는 우리의 인지 능력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한계는 사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대상, 그 대상이 사람이든 아니면 어떤 사건이든, 그 대상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더욱더 객관적으로 알아들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렇다고 100퍼센트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애를 쓰는 거죠.

이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듣는 우리 인지의 과정에도 이와 똑같은 한계와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사람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한 제약이죠.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니까요.

하느님 상(像)을 예로 들어볼까요? 하느님을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우리를 향한 용서와 구원에 대해서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실제 마음속에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보다는 우리를 벌하시고 꾸중하시는 엄한 하느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상이 하느님께 투영돼서 하느님과의 관계도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어머니와의 어려움 때문에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잘 우러나지 않는 모습도 생각할 수 있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찾고 알아들으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주관적인 틀에 비춰서 하느님을 제멋대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인 것이죠.

그렇게 하느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더 알아듣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기준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럴 때야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총을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받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