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혼을 여는 문 '이콘'] 치릴로와 메토디우스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입력일 2017-08-08 수정일 2017-08-09 발행일 2017-08-13 제 305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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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우스.

성 치릴로(Cyrillus)와 성 메토디우스(Methodius)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고관의 아들들로 태어났다.

형 치릴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왕립 학교에서 성 포티우스의 제자로 공부했고, 사제이자 유명한 철학교수가 됐다. 동생 메토디우스는 옵시키온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중 한 지역을 담당하는 총독이 됐지만, 사직한 후 수도자가 됐다.

황제 미카엘 3세는 이들 형제를 흑해 북쪽, 드네프르강과 볼가 강변 지역에 선교사로 파견했는데 그들은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도록 이끌며 성공적으로 선교 여행을 마쳤다. 이후 치릴로는 교황청립 대학의 교수가, 메토디우스는 소아시아 헬레스폰트의 폴리크로니온 수도원의 원장이 됐다.

치릴로는 자신이 선교했던 지역에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었던 것을 기억해, 희랍어를 바탕으로 32개의 문자를 만들었다. 또 메토디우스의 도움을 얻어 성경과 전례서들을 번역했다. 새 문자는 그의 이름을 따서 치(키)릴 문자라 불리게 됐다. 새 문자에 대해 독일 성직자들이 반발하는 일도 있었지만,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인해주고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했다.

이후 치릴로는 수도자가 되어 로마에 머물다 건강이 악화돼 869년 2월 14일 선종,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전에 안치됐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독일 교계제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키고,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870년 독일의 루드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 시노드에서 결의해 메토디우스를 3년간 스바비아로 귀양 보냈다. 그는 요한 8세 교황의 중재로 풀려나 자신의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지켜보던 독일교회는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것과 그의 정통성을 다시금 문제 삼아 메토디우스를 이단자로 고발해 로마로 소환돼 조사를 받게 하는데, 이때 메토디우스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펼쳐, 결국 교황은 교서를 통해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했다.

독일교회와 메토디우스 간의 투쟁은 그가 건강 악화로 인해 885년 4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오늘날 메토디우스와 치릴로는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로 불리며, 서방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동유럽의 정교회들에서도 큰 공경을 받고 있다.

198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을 통해 성 베네딕토와 함께 이들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rn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