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18) 안성성당·안법고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2-07 수정일 2017-02-08 발행일 2017-02-12 제 3031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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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프랑스 신부가 사랑으로 세운 성당·학교 
서양인 배척하는 분위기에도 가난 해결할 포도 재배 전파
신앙 전달·국권 위해 교육도

붉은 벽돌로 세워진 안성본당의 옛 성당(오른쪽)과 새로 지은 현대식 성당(왼쪽).

안성을 찾으면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장소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평택대리구 안성성당과 안법고등학교다.

안성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붉은 벽돌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1922년에 세워진 안성본당의 옛 성당이다. 정면만 보면 그저 유럽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보이지만, 성당의 본 건물은 나무와 기와를 사용한 한옥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구조다.

당시 프와넬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성당이 완공됐다. 기와와 돌은 안성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이 헐리면서 생긴 자재를 사용했고, 목재는 압록강 변과 서산 지방의 나무를 이용했다. 또 성당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지만, 구조와 외관은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목조건축양식을 적용했다.

이곳은 전국적으로도 몇 개 남지 않은 한옥성당 중 하나로, 경기도 기념물 82호로 지정돼 있다.

안성성당에 있는 공베르 신부 흉상.

건물 하나에 서양과 동양이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 우리나라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 노력한 안성본당 초대 주임 공베르 앙트완 신부(Gombert Antoine, 1875~1950)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사실 공베르 신부가 처음 안성에 왔을 때는 주민들의 핍박을 받았다. 지역 주민들은 서양인인 공베르 신부를 막연한 불신을 갖고 대했다. 심지어 신부를 해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기도 하고, 사제관을 부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베르 신부의 마음은 늘 한결 같았다.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병자에게는 약을 나눴고, 성당 마당에 놀러온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이 재배한 포도를 나눠주며 어울리기도 했다. 또 가난한 농촌인 안성 지역 주민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모국인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포도 재배를 실험하고, 지역 주민들이 포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노력으로 ‘불청객’이었던 공베르 신부는 어느새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지가 됐다. 공베르 신부는 2012년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성당 뒷문으로 나서면 우리나라와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던 공베르 신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바로 학교법인 광암학원 안법고등학교다.

안법고등학교 전경.

안법고는 1909년 공베르 신부가 설립한 학교다. 공베르 신부는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는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학교를 설립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데 교육이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선교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공베르 신부는 안성의 안(安)과 프랑스(法國)를 뜻하는 법(法)을 따서 이름을 짓고, 학교를 설립했다.

안법고는 교구 학교법인인 광암학원의 학교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초등교육기관인 ‘사립공교 안법학교’로 시작한 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로 확장됐고, 오늘날에도 고등학교가 지역의 명문학교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안법고를 뒤로 하고 다시 성당을 찾았다. 이번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재의 성당을 바라봤다. 현재의 성당과 옛 성당 사이에는 큰 십자가가 세워져있다. ‘미래의 십자가’다. 이 ‘미래의 십자가’에는, 미래 100년의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려는 본당 신자들의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차가운 날씨에 만난 차가운 금속 십자가였지만, 차갑다는 느낌보다는 어쩐지 따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안성 사람들을 사랑했던 공베르 신부의 마음이 성당과 학교를 통해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진 것처럼, 다시 100년 후의 후손에게도 전해지는 그 마음이 주는 따스함이었을 것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