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구상 시인 (상)

구자명(임마쿨라타·소설가)rn구자명 작가는 (故) 구상 시인의 딸로, 1957년 경상북도
입력일 2016-12-06 수정일 2016-12-07 발행일 2016-12-11 제 302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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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빛’ 세상의 강을 안타까워했던 구도(求道)의 시인

구상 시인 대학시절.

1998년 어느 여름 저녁,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외출했다가 길에서 후진하던 차량에 받혀 다리 골절상을 입고 근처 병원에 입원한 그 길로 위독한 상태에 들었다. 합병증으로 평소 지병인 천식이 도져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본인은 체념했는지 집 가까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주길 간청했다. 입에 호흡기가 채워져 있어 말을 할 수 없던 그는 떨리는 손에 연필을 쥐어주면 종이에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를 써서 의사소통을 했는데,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상태가 더 위급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중에 그는 다시 필담을 요구했다. 급한 대로 작은 메모지를 꺼내 볼펜을 쥐어 주니 거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죽 한번 둘러본 후 다시 혼수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기사회생하여 여섯 해를 더 살다 갔지만, 그날 그가 병원 복도에서 남긴 메시지는 실제 임종 시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터라 가족과 측근들에겐 그의 유언으로 각인되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그는 어째서 그러한 유언을 남겼을까? 자식인 나로서도 늘 그것이 미스터리였는데, 요즈음 아버지가 곧잘 쓰시던 표현대로 온통 ‘연탄빛’ 탁류가 되어흐르는 세상의 강이 안타까워 새삼 시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유미주의자도 참여주의자도 아니었던 시인 구상은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시의 역할을 기대했을까? 이를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만년에 도달했던 세계관을 드러내는 시 한편을 참고하며, 그 세계관을 이루게 되기까지 그가 살아온 삶에서 전환의 기틀이 된 요소들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한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강이 되니 강은 크낙한

한 방울의 물이다.

그래서 한 방울의 물이 흐려지면

그만큼 강은 흐려지고

한 방울의 물이 맑아지면

그만큼 강이 맑아진다.

우리의 인간세상

한 사람의 죄도

한 사람의 사랑도

저와 같다.

―‘그리스도 폴의 江·60’ 전문

낙동강 나룻배에 앉아 시상에 잠긴 구상 시인.

■ 한학자 집안과 수도원 학교의 유년을 지나 방황하는 청년기로

구상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하였으나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가 솔가해 옮겨 간 원산시 근교 덕원(德源)에서 자라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산보다 강을 좋아하였는데, 동네 언덕에 올라 마식령산맥으로부터 발원하여 송도원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는 적전강(赤田江)을 바라보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술회하곤 했다.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독일식 교육방식에 더하여 대대로 벼슬을 지낸 사대부 가문 출신의 아버지가 요구하는 유가(儒家)적 규범들은 유일한 형제인 형과도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막둥이에게 꽤나 버겁게 여겨졌을 듯하다. 다만 백두진사 집안의 고명딸인 어머니가 글과 붓에 능해서 한문의 기초과정은 물론 고시조와 이조의 평민소설, 신소설에 더하여 삼국지연의 등의 중국소설까지 일찌감치 섭렵할 수 있었던 ‘문학 조기교육’의 혜택이 있어 그의 예술가적 기질에 숨통을 틔워주었을 것이다.

그 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 동성상업학교(현 동성

중고등학교) 신학과에 적을 두게 된 그는 종교와 문학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며 버티다가 3년 만에 중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환경 때문인지 그는 늘 ‘문학은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것은 종교, 즉 구도(求道)’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도 결국 전공을 문예과가 아닌 종교과로 정하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평생 그를 지배해 온 상념이었던 듯, 어느 때부턴가 문학, 특히 시야말로 대장부가 후회 없이 일생을 바쳐야 할 가장 존귀한 소업인 줄 알게 된 이후로도 그는 가슴 한구석에 다음과 같은 자기 불만을 품고 살았다.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설날 아침의 황금 햇발 같은 눈부신 시를 써서 온 세상에 빛난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시 ‘요한에게’ 첫 구절)

신학교 중퇴를 기점으로 사제 지망의 뜻을 접은 그는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방황하다가 당시 나라 잃은 젊은 열기가 흔히 그랬듯이 일종의 실존적 유랑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부두나 공장에서 막노동 일을 하다가 결국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종교를 학문으로 접근해 바라볼 기회를 맞는다. 더구나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종교학이란 것은 주로 불교학이었고, 그에 곁들여 수강한 소수의 기독교 강좌는 당시 가톨릭계에서 들으면 질겁할 진보 학설들을 개진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외려 ‘젊음의 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이승에서 저승을 사는 느낌을 주곤’ 하였다. 이렇게 그의 대학생 생활은 청춘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고뇌와 고독 속에서 씁쓸하게 소모되었다. 훗날 그는 자전적 연작시 ‘모과옹두에도 사연이’에서 그때의 암담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숙집 ‘다다미’에 누워

나는 신의 장례식을

날마다 지냈으며

길상사(吉祥寺) 연못가에 앉아

‘짜라투스트라’가 초인(超人)의 성(城)에 오르는

그 황홀을 꿈꿨다.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7’ 중에서

구자명(임마쿨라타·소설가)rn구자명 작가는 (故) 구상 시인의 딸로, 1957년 경상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