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학자 집안과 수도원 학교의 유년을 지나 방황하는 청년기로
구상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하였으나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가 솔가해 옮겨 간 원산시 근교 덕원(德源)에서 자라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산보다 강을 좋아하였는데, 동네 언덕에 올라 마식령산맥으로부터 발원하여 송도원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는 적전강(赤田江)을 바라보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술회하곤 했다.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 학교의 엄격한 독일식 교육방식에 더하여 대대로 벼슬을 지낸 사대부 가문 출신의 아버지가 요구하는 유가(儒家)적 규범들은 유일한 형제인 형과도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막둥이에게 꽤나 버겁게 여겨졌을 듯하다. 다만 백두진사 집안의 고명딸인 어머니가 글과 붓에 능해서 한문의 기초과정은 물론 고시조와 이조의 평민소설, 신소설에 더하여 삼국지연의 등의 중국소설까지 일찌감치 섭렵할 수 있었던 ‘문학 조기교육’의 혜택이 있어 그의 예술가적 기질에 숨통을 틔워주었을 것이다.
그 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유학, 동성상업학교(현 동성
중고등학교) 신학과에 적을 두게 된 그는 종교와 문학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며 버티다가 3년 만에 중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환경 때문인지 그는 늘 ‘문학은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것은 종교, 즉 구도(求道)’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대학에 가서도 결국 전공을 문예과가 아닌 종교과로 정하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평생 그를 지배해 온 상념이었던 듯, 어느 때부턴가 문학, 특히 시야말로 대장부가 후회 없이 일생을 바쳐야 할 가장 존귀한 소업인 줄 알게 된 이후로도 그는 가슴 한구석에 다음과 같은 자기 불만을 품고 살았다.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설날 아침의 황금 햇발 같은 눈부신 시를 써서 온 세상에 빛난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시 ‘요한에게’ 첫 구절)
신학교 중퇴를 기점으로 사제 지망의 뜻을 접은 그는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방황하다가 당시 나라 잃은 젊은 열기가 흔히 그랬듯이 일종의 실존적 유랑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부두나 공장에서 막노동 일을 하다가 결국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종교를 학문으로 접근해 바라볼 기회를 맞는다. 더구나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종교학이란 것은 주로 불교학이었고, 그에 곁들여 수강한 소수의 기독교 강좌는 당시 가톨릭계에서 들으면 질겁할 진보 학설들을 개진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외려 ‘젊음의 활기를 맛보지 못하고 이승에서 저승을 사는 느낌을 주곤’ 하였다. 이렇게 그의 대학생 생활은 청춘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고뇌와 고독 속에서 씁쓸하게 소모되었다. 훗날 그는 자전적 연작시 ‘모과옹두에도 사연이’에서 그때의 암담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숙집 ‘다다미’에 누워
나는 신의 장례식을
날마다 지냈으며
길상사(吉祥寺) 연못가에 앉아
‘짜라투스트라’가 초인(超人)의 성(城)에 오르는
그 황홀을 꿈꿨다.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