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최민순 신부 (하)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군
입력일 2016-11-29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6-12-04 제 302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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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삶으로 ‘하느님과의 일치’ 보여준 스승
가르멜 영성에 심취해
하느님 사랑 깊이 체험
강론·시·수필·논설 등
여러 작품 통해 영성 심화

1956년 최민순 신부 강의 모습. 출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

■ 구원을 향한 여정

최민순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선조들이 쌓아둔 신앙적,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했다. 신학교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교육적 영향을 받았고, 특히 스페인에서 신비신학을 연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인생 여정을 보다 풍성하게 이어나갔다.

그의 영성적 삶에 보다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친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었다.

최 신부에게 있어서 성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관심은 「고백록」을 중심으로 한다. 최 신부는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간 및 하느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풀어 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을 중심으로 성녀의 영성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한 예로, 최 신부가 쓴 「천국으로 띄우는 글월–찬미 예수 마리아 요셉」은 성녀에 대한 이해와 애정, 존경을 잘 드러낸다.

최 신부는 이미 1953년에,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의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해석해 강의함으로써 가르멜 영성을 접하고 심취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 관해 “다른 어느 사람의 영성보다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 현대를 건질 수 있는 구원의 원리를 지닌 영성”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최 신부의 영성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복자찬가’ 악보.

■ 하느님 이해

최 신부의 인생 역정과 그가 깊이 영향을 받은 요소들 및 인물들의 영성을 살펴보면, 그의 신앙 여정은 스페인에서의 신비신학 연구 기간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로는 주로 트렌토공의회 및 제1차 바티칸공의회, 얀세니즘 등이 혼합되어 있던 당시 프랑스교회의 신학과 영성, 그리고 프랑스 문화를 배경으로 지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여정, 아울러 조선 및 한국교회의 다사다난했던 신앙 여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후반부는 주로 스페인의 신비영성, 특히 가르멜 영성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한국교회의 당면 상황과 현실 등의 영향을 받은 신앙 여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최 신부의 작품들 및 강론, 사목활동 등의 경향성을 보면, 대략 전반부에서는 그 방향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많은 장르의 작품을 쓰는 가운데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서정성과 인간애, 동서양 고전의 인용, 민족애, 당시 조선 및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 보편교회 정신과 신학(신앙), 사제적 신원 의식 등의 요소들이 드러난다. 관심의 눈길은 섬세하고 깊으면서도 그 향방이 다양하다. 사목(강론, 강의, 방송, 수필), 문학(소설, 시, 시조, 번역, 작사, 수필, 수기, 서간), 호교론, 사회 참여(논설 등으로) 등의 분야를 망라한다. 사목 활동 측면에서도, 본인의 의견을 상신(上申)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교구 이동과 교구, 본당, 학교, 신문사, 수도회 지도 등의 다양한 직무를 거쳤다. 그러한 중에도 한편으로는 「가르멜의 산길」 등을 번역해 강의했고, 시집 「님」에 포함된 ‘밤’, ‘두메꽃’ 등의 시를 쓰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이미 가르멜 영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하느님 만남을 향한 실존적 희구가 실타래 풀리듯, 그의 존재 저변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반부에는 최 신부의 관심사와 활동이 어떤 하나로 모아져 가며, 횡적인 방향에서 종적인 방향으로 집중되고 통합되고 단순해져 가는 것이 완연히 드러난다.

사목 활동으로는 수도회 지도와 학교, 특히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신학교 교수로서 사제 양성에 헌신했다. 작품 활동은 보다 더 영성적(특히 가르멜 영성에 집중된 시, 수필, 번역), 신학적(강의, 학술세미나), 사목적(피정, 강론, 수필) 색채와 동기를 지닌다. 후반부에도 그의 서정적 경향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해박함, 교회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사제로서의 신원의식의 융합과 심화가 더욱 분명해졌다.

최 신부 삶의 전반과 후반 두 기간의 분기점은 바로 가르멜 영성, 무엇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 따라, 전혀 새로운 듯이 보일 정도로 심화됐다. 따라서 그 분기점은 최 신부 삶의 후반부를 수놓은 ‘하느님 체험’이라는 주제로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 평생을 임만 바라본 구도자, 임을 노래한 시인

최 신부는 평생을 ‘임’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추구 하나만으로 살아간 구도자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점차적으로 완전히 자신을 비워나갔고, 더욱더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제헌했다.

그는 평생을 “하로 하로 살얼음 밟으며/ 祭物(제물)로” 살았으며, “가시 아래 피 번지신/ 당신의 ‘거룩한 얼굴’을/ 밝으신 태양 삼아” 우러렀고, “燔祭(번제)의 흰 재로 남을수록/ 님 사랑 안에 삶이라 함을” 배웠고, “聖三位(성삼위)의 품 속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최 신부는 이름 모를 ‘두메꽃’처럼, 한 송이 ‘채송화’처럼, 혹은 ‘엉겅퀴’가 되어 평생을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숨어 살고, ‘두 눈알을 쟁반에 받쳐 들고’ 깊고 캄캄한 ‘어둔 밤’을 “밀씨 한 톨/ 부활의 씨앗을 심으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의 문인 ‘여명’(黎明)을 향하다가, 주님 당신 등에 곱다시 업혀/ 구름 속 헤치며 창공을 간” 구도자이다. 그는 ‘수동적 정화의 어두운 밤’을 맛보았고,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숨지 않으시는’ 성삼위 하느님, 자신의 임을 관조하리라. 그는 자신의 온 삶으로써 동 시대와 후대에 진정한 신앙인, 사제, 구도자, 영성가, 그리고 자신의 사랑인 ‘임’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참된 하느님 만남의 길을 가르쳐 준 사표(師表)이다. 후대의 사람들이 많은 배울 점들을 찾아 계속 최민순 신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극한 겸손과 인내로, 오직 ‘숨어 계신’ 임과의 일치를 향해 어두운 밤을 걷고 있는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에게서 최민순 신부의 자취를 찾아야 하며, 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일 신부(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장)rn198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반포본당 보좌, 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