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정지용 시인 (하)

구중서( 문학평론가)rn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
입력일 2016-10-12 수정일 2016-10-12 발행일 2016-10-16 제 301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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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 현실에 울분 토로
939년 「문장」 창간해 신인 발굴
임시정부 요인 귀국하자 축시 지어 환영
6·25 전쟁 때 행방불명돼 안타까움 남겨

1930년 시문학 창립 동인.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김윤식. 충북 옥천군 제공

■ 사회와 민족의 현실을 보며

정지용 시인의 신앙은 계속 돈독해져 1937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재속회원(在俗會員)이 된다. 이때 함께 입회해 서울 백동(혜화동) 성당에서 착의식에 참여한 이들은 장면, 장발, 유홍렬, 한창우 등이었다. 해방 후 장면은 내각제 제2 공화국의 총리가 되고, 장발은 서울대 미대 학장이 됐다. 유홍렬은 교회사학자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 그리고 한창우는 경향신문 사장이 됐다.

그리고 정지용은 1930년대 당시에 이미 문단의 대표 시인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문단에서는 모더니즘 운동이 일정한 성과는 거뒀지만, 유럽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 아래서 문학의 위상은 허약한 맨손이 되어 갔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허사였고 얻은 것은 표현 언어의 말초화뿐이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 정지용 시인은 가톨릭신자로서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다른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1937년 정초 조선일보의 ‘문학 문제 좌담’에서 정지용 시인이 말했다.

“문학은 신변잡사를 그리기보다 사회적 관심과 민족적 사실에 대해 열정을 가져야한다.”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정지용 시인은 유망한 후진들을 배출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9년에 월간 문예지 「문장」이 창간된 후 이 지면을 통해 신인들을 발굴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시인을 문단에 내보냈다. 이들이 해방 직후에 「청록집」(靑鹿集)이라는 합동시집을 내 청록파로 불리게 된다.

일제가 조선어의 사용마저 금지하는 1940년대 초까지 청록파 시인들이 활동하는 것은 민족문학사의 주요한 대목이다. 청록파는 친일의 추세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을 예찬하며 박두진의 시 ‘해’에서 보듯이 역사의 부활 의지도 지녔다.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정지용이 시집 「백록담」(1941)을 간행한 것은 일제 하 그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갠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산문시 형식으로 된 「백록담」은 토속의 전설을 담은 한라산 백록담의 정서를 정갈하게 그렸다. 그러면서 고단함과 쓸쓸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망각하지 않는 신앙의 ‘기도’를 떠올린다.

1941년 일제가 미국 공군기의 도회지 폭격에 대비한다는 소개령을 내려 정지용 시인은 경기도 부천의 소사 마을에 이사하고, 그곳에서도 천주교의 공소 예절에 열심히 참례하며 지냈다.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 출처 위키미디어

■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민족 해방의 날이 왔다. 정지용 시인은 이화여전의 교수가 됐다. 그러나 해방은 환희의 봇물이 터진 것 같은 감격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당시 소련이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을 긋고, 남쪽과 북쪽으로 새로운 점령자가 되어 들어왔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3년 11월에 연합국 정상들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종전 후의 문제들에 대한 원칙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특별조항을 두어 “종전 후 한국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그 뒤 얄타 비밀협정을 거치면서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해 점령하기로 변질이 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단체로 입국하는 것을 막아, 11월에야 임정 제1진이 귀국했다. 벌써 분단과 혼란이 고조돼 상해 임시정부의 귀국에 개선의 영예를 모아 주지 않았다. 이때에 정지용 시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임정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나아가 축시를 낭송했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금의는 커니와 / 전진(前塵) 떨리지 않은 / 융의 그대로 뵈일 밖에 // 상기 불현 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부분)

이역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한 영웅들이지만 이들의 귀국이 금의환향이 못되고 있음을 정지용 시인은 가슴 아파 했다. “먼지 묻은 전투복 차림채로 맞이하노니, 가시덤불을 눈물로 헤치며 들오시라”는 시였다. 정지용의 이 심경은 강대국 외세의 횡포와 동포의 남북 분단에 대한 통분이었다.

게다가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남한 내부에서는 친일의 과오가 있는 이들이 재득세하는 부조리가 있어 시인의 양심에 상처를 입혔다. 정지용 시인은 시국의 현실에 스스로 고뇌하며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경향신문 주간직과 이화여대 교수직을 다 사임하고 녹번동 자택에서 은둔한다.

1948년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는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의 심경이 가장 잘 나타난다.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 늙어간다…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런 것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서문’ 부분)

이렇게 순국 시인 윤동주를 찬양하고,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 속에서 정지용 시인은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어디엔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정지용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올곧은 생애는 민족 문학사에 불멸의 풍요한 자산이 되어 있다.

구중서( 문학평론가)rn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계속해왔다. 서울대교구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