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체홉(1860~1904, 러시아)의 ‘세 자매’는 오이디스프, 햄릿, 리어왕과 함께 연극사 최고의 걸작이다. 말기 폐결핵으로 투병하던 체홉은 “이 극은 쓰기 어렵고 다른 작품보다 재미도 없고 장황하며 어색한 것 같다”고 했다. ‘세 자매’에는 멋진 액션도, 반전이 주는 재미도, 매력적인 주인공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골에서 별 볼일 없이 사는 세 자매와 외아들인 안드레이가 자기들이 태어나고 자란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만 늘어놓는 게 전부인 밍밍한 이야기다. 1901년 초연 이래 지금까지, 모든 언어로 세계 어딘가에서 거의 매일 공연되고 있는 ‘세 자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맏이 올가는 고등학교 교사, 올드미스다. 일도 권태롭고 결혼하기엔 늙어버린 것도 한탄스럽다. 일찍 결혼한 둘째 마샤의 결혼생활은 실망스럽다. 말이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모스크바로 가서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게 소원인 막내 이리나. 셋은 행복했던 모스크바 시절을 회상하는 게 낙이다. 오늘은 막내 이리나의 생일.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새로 부임된 초면의 중령 베르쉬닌도 있다.
모스크바에서 온 남자! 셋은 환호한다. 세 자매는 그를 둘러싸고 모스크바의 소식을 묻고 또 묻는다. 모스크바에의 그리움과 열망은 점점 더 깊어진다. 마샤는 베르쉬닌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이리나는 모스크바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뚜젠바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성큼 다가온 모스크바! 그러나 시간은 저 혼자만의 길로 흐르는 것. 모스크바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시의 서기가 된 안드레이. 날이 갈수록 천박해지는 아내와 자신의 처지로부터 도망친 곳이 도박이다. 안드레이의 노름빚으로 살던 집이 넘어가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세 자매의 시간은 이제 거칠게 흐른다.
소속 부대에 떨어진 이동명령으로 이별을 해야 하는 베르쉬닌은 아직 이별할 준비가 안 된 마샤에게 “잊히겠죠. 소중하고 의미 있게 여겨지던 것도 세월이 지나면 잊힙니다. 하찮은 것이 되죠.” 위로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마샤는 더욱 말이 없어진다. 내일이면 뚜젠바흐와 결혼하여 모스크바로 떠나는 이리나는 들뜨고 바쁜데, 그때 들려오는 한발의 총성 그리고 달려오는 소식이 충격적이다. “피할 수 없는 결투로 뚜젠바흐가 죽었습니다.”
이리나의 우주는 무너져 내린다. “일을 해서 기쁨을 찾을거야!” 그 부르짖음이 운명의 귀에 들리기나 했을까. 올가와 마샤와 이리나, 슬픔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걸 가슴에 묻어 둘 줄도 아는 법이다.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올가의 목소리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저만치에서 아이도 없는 유모차를 끌며 안드레이가 걷고 있다. 아니 빙빙 돌고 있다. 꿈이 떠난 빈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세 자매 역시 걷는다. 아니 빙빙 돌고 있다. 그리고 뿌옇게 들리는 대사 “모스크바, 모스크바,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연극은 막이 내린다.
모스크바는 무엇일까. 세 자매에게 모스크바는 그들의 존재 이유,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는 구원의 장소, 구원 그 자체이다. 세 자매는 ‘아무데나’에 머물러있고 그 머무름은 그들의 존재양식이다. 머물되, 어떻게 머물건 가, 그것이 올가가 알고 싶었던 것이고 우리도 알고 싶은 삶의 비밀이다. 그러나 삶에 비밀은 없다. 내 몸으로 짊어진 하루의 고단한 짐을 지고, 내 앞의 문 그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여는 것. 문 뒤에 있는 게 무엇이든 온 맘과 온 힘으로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니.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연극 ‘꽃상여’ ‘안녕 모스크바’ ‘수전노’ ‘유리동물원’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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