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하)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입력일 2015-10-13 수정일 2015-10-13 발행일 2015-10-18 제 2965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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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줄 수작업 묵주에 깃든 ‘섬김·기도의 삶’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설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대구관구 수녀들은 초창기의 힘들었지만 열정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소박하지만 위대한 유산인 유물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껴본다.

대구 수녀원 역사관의 유물은 지금은 지나간 역사에 불과하지만 옛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속에 담겨진 정신들을 이어가게 하고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특히 역사관 유물 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수도복은 아직도 그 수도복을 기억하는 연로한 어르신들에게 당시에는 신기한 복장인 검은 수도복 수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두꺼운 흰 광목천에 풀을 먹여 빳빳한 모자처럼 생긴 코르넷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버스를 탈 때 머리에 높게 올려진 코르넷은 옛날 낮은 버스 천정에 닿을 듯했고 붐비는 사람들 틈에선 상당한 불편을 주위에 주었다. 비 오는 날이면 풀 먹인 코르넷이 비를 맞아 축 처지기도 해 수녀들은 검은 우산을 늘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전례 때에는 코르넷이 머리 정수리 위로 모아진 형태에서 아래로 내려졌다. 주변을 향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시키고 내외적으로 침묵하기 위함이다. 일하거나 길을 갈 때는 위로 올려 보행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사용했다.

옛 수도복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수녀들은 수도복 허리에 검은 묵주 10단을 걸고 다녔다. 첫 서원자는 구리 십자가가 달린 5단 묵주를 허리에 걸고 다녔고 종신 서원자는 묵주알 십자가가 달린 묵주 5단을 더 첨가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무게와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검고 굵은 묵주 알이 수녀들이 걸을 때 사각사각 소리를 내어 지나가는 행인들이 듣고 수녀들의 존재를 의식하곤 했다. 당시에 이 묵주는 수녀들이 손수 만들었는데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굵은 구리줄을 비틀어 고리를 만들고 묵주 알을 연결하느라 손끝이 부르트고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던 시절이지만 한 알 한 알 엮으며 수녀들은 기도 속에 수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 의탁한 유물이기도 하다.

종신서원자가 수도복 허리 끈에 걸고 다니던 두 개의 5단짜리 묵주. 첫 서원, 종신서원 때 받았다.

유물들은 단순히 지나간 세월들을 보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늘 기도하며 일했던 수녀들에게 힘겨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 또한 필수였음을 한 장의 옛 사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수녀원 농장에서 보리를 수확하는 수녀들의 사진이다.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고아들과 함께 어려운 시절을 넘겨야 했던 수녀들에게 노동은 생활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구순의 노 수녀는 어려웠던 수녀원 살림을 옛 사진 한 장에서 떠올렸다. 우물이 수녀원에 하나밖에 없어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우물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보리타작으로 몸속에 들어간 보리 검불을 씻어내지 못할 만큼 물이 부족해 참고 밤을 지내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미소 짓는 모습이 가난함이 곧 불행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포기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느끼게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보리베기 하는 수녀들.

용기를 잃지 말고 선한 일을 하도록 재촉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역사관 맞은편에 자리한 양수탑이다. 1950년 무렵에 지어진 외부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양수탑은 지금도 튼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 형식의 구조물이다. 당시 수녀원 내에는 우물이 하나뿐이었기에 물 부족이 심각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대가 높아 수도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인데다 매일 나오는 수많은 보육원 아이들의 빨랫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녀들은 매일 빨래거리를 싣고 10리나 떨어진 시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서 그곳에서 일부 말려 저녁에 가져와 아이들에게 입히고 아침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빨래를 하는 일을 되풀이해야 했다. 이 사정을 안 당시 미국인 군종 신부가 수녀들의 선한 일에 자신의 선한 마음을 보태줬다. 우물을 파서 그 위에 높은 탑처럼 만들어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려 탑에 물을 저장한 후에 필요시에 쓸 수 있도록 높은 저수조를 만들어 수녀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그 양수탑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해 둔 것은 타인의 어려움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한 사마리아인의 행적을 남겨 둠으로써 무관심으로 지나치기 쉬운 우리들에게 멈추어 생각하고 묵상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도자들의 힘겹지만 보람된 일상을 간직한 양수탑. 우물을 파서 물을 저장하는 장치였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역사관이다.

유물은 결코 과거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이것 외에도 서원 때 수녀들이 머리에 쓴 화관, 서원기도문 등을 역사관 전시대에서 볼 수 있다. 라틴어 서원문답을 한글로 번역해 와 강의해 주었던 최덕홍 주교님(전 대구대교구장), 한글 서원문답으로 수녀들의 서원 준비를 도왔던 그분의 사랑을 서책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전달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의 보물이 있다. 한국전쟁 중 북한에 납치돼 ‘죽음의 행진’을 하다 순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첫 한국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의 친필 편지다. 프랑스인으로 어렵게 한글을 배운 베아트릭스 수녀가 1944년 첫 서원을 준비하고 서원을 청하는 어린 수녀에게 보낸 한글 편지 진본이 있다. 서툴고 문장 연결이 안 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글로 또박또박 적은 답서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랑하올 베로니카 수녀에게 답서. 허원 달라는 편지를 잘 받아 보았소 <중략> 순명, 겸손, 인내 그리고 많이 사랑하시오 <중략> 강복 신공도 받으시오.>

역사관의 유물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옛것이 아니다. 그 유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주인들과 교감하고 이야기하고 그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게 만든다. 유물의 숨은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껴 역사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문의 010-2924-2646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담당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