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00)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7) - 강퍅함의 변주곡 : 이스라엘 백성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15-01-06 수정일 2015-01-06 발행일 2015-01-11 제 292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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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하늘을… 불평이 감사로 바뀌게 되리라
■ 불평불만의 레퍼토리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시작된 광야여정은 낭만이 아니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를 동원하시는 하느님의 동행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이름하여 반항의 장소이기도 했다. 연이어 터지는 그 아우성의 레퍼토리는 그야말로 죽 끓듯 변덕스러웠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막 들어섰을 때 이집트 병사들이 뒤쫓아 오자, 그들은 모세에게 항의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신’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해댔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3)

그러더니 이제 시나이 산 계약의 시기를 지나 다시 광야 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금세 또 볼멘소리가 터진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은혜롭게 내린 만나도 물려서 못 먹겠다는 투정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불평불만에 어떻게 대응하실까? 상태에 따라서 두 가지로 달리 응답하신다.

우선, 절대적인 불평불만은 들어주신다. 즉, “죽게 됐어요”, “먹을 게 없어요” 이럴 때는 들어주신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까.

하지만! 상대적인 불평불만은 안 들어주신다. 예컨대, 이미 만나가 있는 상태에서 “맛없다”고 구시렁대면, 들어주지 않으신다. 일단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없는 악순환에 빠지니까.

■ 구리 뱀

거듭된 불평불만의 대단원은 그 유명한 구리 뱀 사건이다. 드디어 광야생활 끝자락! 이쯤 되면 참는데 이력이 붙었을 만도 한데, 또다시 원성이 들끓는다(민수 21,5 참조).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 노릇이니, 하느님의 역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극약처방으로 불 뱀들을 보내시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물려죽게 하신다. 이를 보다 못한 모세가 하느님께 백성을 위해 기도하자, 비방이 내려진다.

“구리 뱀을 장대 높이 올려라. 그리고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민수 21,8 참조).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처방. 여기에는 하느님의 고단수 지혜 두 가지가 감춰 있었다.

첫째,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 순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말이 안 되는 처방을 두고, 사람들은 “그거 쳐다본다고 낫냐? 약을 주든지, 연고를 주든지 해야지” 하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안 하면 죽게 되었으니 어찌됐든 쳐다보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쳐다본 사람은 살았다. 납득이 안 되어도, 주님 말씀대로 행했더니 살아난 것이었다! 바로 이를 깨달으라는 조치였던 것이다.

둘째, 바라봄의 영성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야 한다. 그러면 그 시선 너머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 어른거리기 마련이다. 이는 모든 불평불만의 원인이었던 ‘땅만 내려다보는 시선’의 정반대다. 그러기에 “높이 올려다보라”는 분부는 불평불만을 멈추고 ‘감사와 믿음’의 기도를 올리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형을 높이 올려진 뱀(요한 3,14 참조)에 비유하셨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산다. 이 시대의 구리 뱀인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극명한 깨달음이다.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그냥 받아들여라.

아무리 엉터리 같더라도 주님의 말씀이라면 그냥 따라라.

죽어가던 이가 벌떡 일어나는, 별별 일을 보게 되리라.

그제야 너희가 “아 그 말씀이 맞았구나!”하리라.

이변을 보게 되리라.

땅만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높이 올려 보라.

땅의 소출에만 기대지 말고, 하늘의 돌보심에 의지해 보아라.

상처가 생살로, 고생이 축복으로, 불평이 감사로 바뀌게 되리라.

그리하여 너희가 “할렐루야, 아멘!” 하게 되리라.

■ 말로 번 매, 광야 40년

광야생활 40년!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로써 번 매였다.

홍해바다를 건너 이스라엘 민족이 ‘파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한 지파에서 한 명씩, 똑똑한 청년 12명을 뽑아서 들여보낸다. 그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10명은 아주 비관적인 견해를 밝힌다. “거기에는 장대같이 키가 큰 거인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섰더니 꼭 우리가 메뚜기만 하게 보였습니다”(민수 13,32-33 참조).

반면 여호수아와 칼렙은 반론을 펼친다. “그 땅은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민수 14,8-9 참조).

한 쪽은 스스로를 ‘메뚜기’라 보았고, 한 쪽은 상대방을 ‘밥’으로 보았다. 의견이 현격하게 갈린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일로 하느님께서는 ‘흑사병’을 내려 몰살시키기로 작정하신다. 모세가 극구 말리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계획을 바꾸신다.

“그래. 내가 봐주기는 봐주는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 자, 이제 이 백성들 가운데서 데리고 갈 사람을 솎아 내리라. 너희들이 40일 동안 정탐한 다음 고작 고따위 얘기를 했으니까,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리라. 이 시련을 견뎌낸 이들만 그 땅으로 들여보낼 것이다”(민수 14,20-25.27-35 참조).

이렇게 해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결정된다. 결국,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치유하기 위한 하느님의 처방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아주 무서운 말씀을 내려 주셨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4,28).

이 말씀 그대로, 스스로를 ‘메뚜기’로 지칭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꼴이 되었고, 상대를 ‘밥’으로 선언했던 여호수아와 칼렙은 영광의 주역이 되었다. 말로써 운명이 갈렸던 것이다. 민수기의 이 말씀은 별생각 없이 나쁜 말, 독한 말, 빈말을 남발하는 이 시대 우리를 향한 일침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지마라, 그 팔자 그 모양이 되리라.

“죽겠다, 죽겠다” 하지마라, 결국 죽게 되리라.

“난 못해”, “난 못 믿어”, “절망이야” 하지마라, 영영 족쇄가 되리라.

노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감사할 일이 자꾸 생기리라.

연신 “할렐루야, 아멘” 하라, 찬미할 일이 거듭 생기리라.

“할 수 있다”, “믿습니다”, “희망이야”하라, 만능열쇠가 되리라.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