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21) 샐리 스콧과 ‘화해의 성모 채플 유리 스크린’

최정선(미술사학자)
입력일 2014-12-09 수정일 2014-12-09 발행일 2014-12-14 제 2923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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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조각화로 재현된 성모님 ‘수태고지’

영국 성모순례지 ‘월싱엄’, 비전 950년 기념작
포도넝쿨은 성찬례, 조개껍데기는 순례자 상징
수묵화 연상시키는 여백과 음영 화법 독특
샐리 스콧, ‘화해의 성모 채플 유리 스크린’, 2010, 영국 월싱엄 로마가톨릭 성당외부에서 본 모습. 닉 카터(Nick Carter) 제공
샐리 스콧
영국 출신의 화가이자 유리 조각가인 샐리 스콧(Sally Scott)은 영국 크로이던 미술대학과 왕립예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녀는 1963년에서 1991년까지 버밍엄 미술학교, 혼지예술대학, 미들섹스 폴리텍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작가로서 그녀의 작업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회화작업이고 둘째는 건축적인 글라스 인그레이빙(glass engraving) 작품이었다. 특히 그녀는 1986년부터 2000년까지 ‘Peace & Scott’이라는 이름으로 다비드 피스(David Peace)와 함께 잉글랜드 북서단의 컴브리아(Cumbria)에서 콘월(Cornwall)까지 공공 건축물과 다섯 개 대성당에 건축적인 유리 프로젝트를 공동 작업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서쪽 문, 노리치 대성당(Norwich Cathedral) 성 카타리나 채플의 문 등이 있다. 스콧은 독자적으로도 건축적인 유리 조각 작품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 중에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 로얄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 랭커스터(Lancaster), 셰필드(Sheffield), 옥스퍼드(Oxford)와 케임브리지(Cambridge University)대학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장소와 건축물에 그녀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그녀는 런던과 프랑스 남서부 지방 랑그도크(Languedoc)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리소그래피’(lithography)라고 하는 석판화작업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 기법을 유리 작업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샐리 스콧의 현대적인 작품 중 영국의 오래된 순례지 월싱엄(Walshingham)에 있는 유리 스크린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대중들에게 캔터베리 대성당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월싱엄은 유럽의 대표적인 성모성지 중 하나이다. 핀손 발라드(Pynson Ballad)의 텍스트에 따르면 1061년 신앙심 깊은 여인(리쉘디스 부인)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잉태사실을 알려준 ‘나자렛의 집’을 보여주고 이 사실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똑같은 집을 월싱엄에 짓도록 원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일명 ‘슬리퍼 채플’(Slipper Chapel)이다. 이후 월싱엄은 중세인들에게 중요한 성지로서 알려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이곳은 파괴되고 피폐해진 채로 남겨졌고 가톨릭 해방령(1829)이 내려지고 비로소 1896년 샤를로트 보이드(Charlotte Boyd)가 14세기 슬리퍼 채플과 그 주변 지역을 사들여 복원하였다. 현재 월싱엄은 성공회와 가톨릭교회에 성지로서 두 종교의 기념 성당이 들어서 있고 매년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바로 샐리 스콧의 작품은 가톨릭 성당 제단 뒤의 유리 스크린으로 설치된 것인데 이 작업을 위해 그녀는 성당 참사회와 수차례 회의를 거친 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 유리 스크린의 제작은 2010년 11월 월싱엄의 비전 950년을 기념하는 준비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아홉 쪽으로 나누어진 이 유리 스크린은 크게 세 부분의 테마로 다시 나누어볼 수 있다. 월싱엄의 주된 두 개의 테마는 중앙 날개 역할을 하며 제단화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즉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광선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인에게 ‘나자렛의 집’을 보여주는 성모님의 발현 장면이, 오른쪽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잉태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조각되었다. 이러한 사실적인 이미지들과 더불어 유리 스크린에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함께 재현되었다. 나뭇가지 아래에는 성찬식을 상징하는 포도덩굴과 밀단이, 중앙에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껍데기들이 묘사되어 있다. 조형적으로 볼 때 유리 화면에 묘사된 모든 인물들과 식물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이미지들이 감상자에게 충만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실적인 묘사, 단순한 선과 면,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여백과 음영? 어쩌면 유리 스크린에 비친 실제 밤풍경이 화면을 메워 비로소 작품을 완성한 때문은 아닐까. 하느님이 만드신 낮과 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선물은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지친 순례자에게 또 다른 은총이 될 것이다. 캄캄할수록 더 밝게 빛나는 촛불처럼 절망이 깊은 이에게 하느님은 더 깊게 자신을 드리우시리라.

최정선씨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최정선(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