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나는 평신도다] ‘선교의 달인’ 김종분 할머니

전창남 명예기자
입력일 2012-09-25 수정일 2012-09-25 발행일 2012-09-30 제 2814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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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신앙체험 복음선포로 승화
선교는 발로 뛰어야 함 보여
외환위기·사별 등으로 고난
역경 딛고 봉사의 삶 찾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선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뛰어야 함을 보여주는 선교의 달인 김종분(에스텔·76) 할머니. 현재 고등동본당 노인성경대학 학생회장인 김 할머니는 수원대리구 성령기도회 성령쇄신 중재기도 분과장 겸 안내부장, 파티마의 성모 셀 기도회 부회장, 레지오 마리애 다윗의 탑 쁘레시디움 단장 등을 맡고 있다.

김 할머니가 입교시킨 사람은 현재까지 25명.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조차 웃는 낯으로 종교를 묻는다. 종교가 없다고 하면 천주교에 나오라며 5~6회 정도 방문해 자신의 신앙체험을 들려준다.

“저는 성당에 나오면 좋다고 말합니다. 신부님, 수녀님이 독신으로 신자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하고, 성당은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당 입교 날짜가 잡히면 시간 약속을 하고 미리 그분들을 모시러 가는 것은 당연하죠.”

교리시간을 확인하고 출석하지 않았을 때는 전화나 방문을 통해 교리 공부를 지속하도록 돌본다. 세례를 받은 후에는 본당 신심단체에 안내하고, 주일미사에 참례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만약 미사를 빠지면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묻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본당 차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지금 생각하면 오래 전 저는 교만 덩어리였죠. 하느님은 그런 저와 제 가정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질서를 바로잡고 의롭게 살라고 가르쳐주셨어요.”

그가 선교에 나선 것도 자신의 신앙체험 덕이었다. 1978년, 서울에서 세례를 받은 김 할머니는 반장과 구역장을 맡고 있었지만, 세상사에 마음이 쏠려 친목계를 하며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일에 열심이었다. 당시 남편도 종업원 200여 명을 거느리는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상당한 돈을 벌고 있었다. 세상살이에 부족함이 없던 그는 이것이 행복이고 천국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1998년, IMF 금융위기로 남편의 사업과 회사가 부도가 났다. 갈 곳이 없게 된 그들에게 시동생이 거처를 마련해줘 수원에 오게 된 것이다. 이후 경비일을 하던 남편에게 2000년 작은 아들이 성당에 갈 것을 권유했고, 남편은 그해 11월 세례를 받았다. 집안 모두가 신자가 되던 순간이었다. 과거의 아픔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한 김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봉사하던 그에게 남편은 이별이라는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례 후 레지오 활동과 연령회 총무를 맡았던 남편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주님은 나의 방패, 희망, 구원자임을 굳게 믿고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주님을 믿고 찬양하며 살려고 합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신앙체험이 어떤 사람에게 도움이 된 다면 감사하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전창남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