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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인터뷰] 주교수품 50주년 맞은 초대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11-06-15 수정일 2011-06-15 발행일 2011-06-19 제 275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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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이루신 일, 우리는 모두 도구일 뿐”
‘인천 깍쟁이’라 불릴 만큼 검소한 삶 살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향한 사랑실천 강조
‘나누는 교회’로서 선교에 힘써줄 것 당부
“성령께서 임하여 이루신 일, 우리는 모두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나길모 주교는 앞으로도 기도로써 인천교구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9년의 시간 동안에도 우리나라가 정말 큰 발전과 변화를 이뤘네요. 교구 내 시설들도 다양하게 설립되고, 사제 수는 물론 신자 수가 크게 증가한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고 마음 깊이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인천공항에 발을 디딘 직후부터 나길모 주교(윌리엄 존 맥나흐튼 굴리엘모)는 곳곳의 발전되고 변화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천교구 내 사회복지시설들을 돌아볼 때도 감탄사를 절로 냈다. 특히 인천가톨릭대학교에 들어설 때는 남다른 소회를 감출 수 없었다. 수없이 고비를 넘기며 마련했던 성소의 못자리에서 이제 해마다 평균 20여 명 이상의 사제가 탄생한다는 소식은 노(老) 주교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했다.

인천교구 설정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방한한 그를 위해 교구민들은 주교수품 50주년 축하행사를 마련했다. 인천교구장직 은퇴 후 꼭 9년만의 만남이었다.

올해는 인천교구가 설정 50주년을 맞은 희년이다. 나길모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 주교로서의 삶 또한 이 시간과 햇수를 꼭 같이한다.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 중에 마련한 특별인터뷰는 한국과 인천교구에 대한 나 주교의 사랑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내가 처음 교구장으로 착좌했을 때 우리 교구 신자는 2만3169명이었습니다. 인천교구 신부님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신자 수가 45만 명을 훌쩍 넘어섰지요. 신부님들도 277명이나 됩니다.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나길모 주교는 전쟁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한국 땅에 첫 발을 들였다. 28세의 젊은 선교사였다. 청주교구 본당 주임 등을 역임하던 그에게 교황 요한 23세는 인천교구장직을 맡겼다. 35세 나이로 주교가 된 그는 이후 40여 년간 인천교구민들의 아버지로 한결같은 헌신을 보여왔다. 주교수품 50주년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나 주교는 “성령께서 임하여 이루신 일, 우리는 모두 도구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나길모 주교는 최재선 주교에 이어 한국교회에서 두 번째로 주교수품 50주년을 맞이한 교구장 주교다. 1961년, 그는 주교로 임명됐지만, 돈이 없어 본국(미국)에 가서 주교품을 받아야 했다. 당시 나 주교는 그곳 교구장 추기경님께 축하선물로 받은 1만 달러, 가족과 지인들이 모아준 돈 1만 달러, 교황청에서 지원한 1만7000달러를 품에 넣고 인천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 돈은 한달도 채 되지 못해 바닥이 났다. 건축비가 부족해 공사가 중단된 성당이며, 박문초등학교며 당장 지원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천교구는 설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도 걱정해본 적은 없습니다. 모든 신자와 성직·수도자들이 한마음으로 영적·물적 헌신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 주교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인천교구와 인천교구민을 위해 기도한다. 매일같이 빼먹지 않는 일과라고. 하지만 여전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은퇴 전에 최기산 주교님과 2년3개월간 함께 일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믿고 떠날 수 있었지요. 더욱이 지난해 정신철 보좌주교님께서 임명되셔서 더욱 든든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구 신부님들은 항상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었기에 늘 굳게 믿었지요.”

나 주교는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를 꿈꿨다. 사실 주교나 다른 역할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단지 어느 본당에 가든 열심한 본당사제가 되겠다는 다짐뿐이었다. 레지오마리애를 통한 사도직 활동도 널리 알리고 특히 신자들이 주일미사와 고해성사에 열심하도록 돕는 사목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구장 주교가 되면서부터는 해마다 교구의 모든 본당을 꼭 방문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해가 갈수록 본당이 늘어 은퇴 즈음에는 힘겨움도 많았지만, 사목방문은 꼭 실천했다. 교구와 본당의 사목틀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주일학교 활성화에도 애틋한 정성을 쏟았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인천지역민들을 위해 병원과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짓고 복음화에 나서는 데에도 한결같은 힘을 기울였다.

일반 국민들,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양심의 등불’로 기억된다. 196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돕다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지속적인 탄압도 나 주교의 신념을 꺾진 못했다. 한국에서는 최초로, 또 현재까지 유일하게 ‘노동자주일’을 제정한 교구장도 바로 나길모 주교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도 과부와 고아를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금을 모아 나눠줬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이웃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돌리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 주교는 최근 가장 가슴 아프게 듣는 소식은 낙태 문제라고 토로한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낙태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신자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나 주교는 현대인들의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교회가 세속화에 휩쓸리지 않고 더욱 소박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돌아가 이웃들을 돌보는데 힘쓸 것을 당부했다.

“세속화가 너무나 심각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 평균 미사참례율도 제가 은퇴할 당시에는 31%였지만, 최근엔 24%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개개인이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나 주교는 한국교회, 특히 인천교구를 생각하면 희망의 웃음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교구 설정 50주년 행사 때 청언본당과 병원,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을 봉헌하는 교구민들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줬다. 특히 나 주교는 한국교회가 ‘나누는 교회’로 변모한 것을 누구보다 반겼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전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해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때입니다. 예전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등지에도 수많은 선교사를 파견했던 프랑스교회는 현재 사제 수 급감으로 힘겨워합니다. 미국에서도 은퇴사제에 비해 새로 서품되는 사제 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어 문을 닫는 성당들이 날마다 늘어갑니다. 여전히 뜨거운 한국의 성소자 양성 등이 희망입니다.”

선교사로서 꼭 갖춰야 할 자세도 잊지 않고 당부했다. 나 주교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며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개개인의 생활이 거룩하고 올바르지 않으면 타인들이 그 말을 듣지 않는다”고 전했다.

나 주교는 주교로서의 지난 50년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쉬움과 부족함 투성이라고 반복한다. 더욱 열심히 일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하지만 교구민들은 그를 누구보다 성실한 사목자, 따뜻하고 소박한 아버지 주교로 기억한다. 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인천 깍쟁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검소한 삶을 살았던 주교. 누구보다 교구 사제들을 믿고, 교구민들을 사랑했던 주교는 앞으로도 기도로써 인천교구와 함께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인천교구민과 사제들, 수도자들에게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을 말할 수 없이 사랑합니다.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교회에서 새 복음화, 재 복음화, 사회복음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안으로는 기쁘고 사랑 넘치는 공동체, 밖으로는 하느님 아버지를 더욱 널리 알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여전히 한국을‘우리 나라’, 인천교구를 ‘우리 교구’라고 부르는 나 주교는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현재 나 주교는 미국 보스턴대교구에 머무르며 글라라봉쇄수도회와 콜럼버스 기사단, 교구 내 한인신자들의 영적 돌봄에도 힘쓰며, 주교수품 모토인 ‘UT OMNES UNMMSINT(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을 실현하고 있다.

약력 - 나길모 주교는?

■ 본명: 윌리엄 존 맥나흐튼(Willam John McNaughton)

▲1926년 12월 7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시 출생

▲1953년 6월 13일: 사제서품

▲1954년 7월 22일: 한국(부산) 도착

▲1954~55년: 충북 장호원본당 보좌

▲1955~57년: 청주 북문로본당 주임

▲1958~59년: 청주교구 참사

▲1959~60년: 청주교구 부감목

▲1961년 6월 6일: 인천교구장 임명

▲1961년 8월 24일: 주교수품

▲1961년 10월 26일: 초대 인천교구장좌 착좌

▲1963년 6월 16일: 제1회 인천교구 성체거동

▲1965년 6월 1일: 인천 명예시민증 취득

▲1967년 6월 20일: 인성회(현 가톨릭사회복지회) 창립

▲1968년 1월 20일: ‘강화도 사건에 관한 메시지’ 발표

▲1996년 3월 2일: 인천가톨릭대학교 개교식 및 입학식

▲1999년 6월 6일: 인천교구 제1차 시노드 개막, 2000년 11월 19일 폐막

▲1999년 11월 15일: 갑곶성지 축복미사

▲2001년 6월 6일: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신앙쇄신대회

▲2002년 4월 17일: 노동자주일 제정

▲2002년 4월 25일: 인천교구장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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