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년수상 릴레이] 1. 한자루 촛불되어

홍준오 시인ㆍ금호동 본당총회장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3-01-01 제 133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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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벗으로 사목일선서 영일없는 신부를
그들 신앙 본받아 스스로 태우고 작아지고파
대림 제3주일. 제탁 위에 장치된 대림환(待臨環)의 촛불이 요요히 타고 있다. 저 마지막 촛불 하나마저 타는 날이면 이세상 빛이 되어 주님이 오시리라.

오늘 따라 사제의 말씀이 하느님의 계시인 듯 무겁고 짙게 가슴으로 파고든다. 뒤미처 요한세자의「광야에서의 외침」이 귓가에 쩌렁한다.

『너희는 회개하라. 그리고 그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

죄의 비늘이 겹겹으로 엉겨붙은 눈까풀을 무것게 내려 깔며 나는 도무지 주님앞에 숨소리도 상간다. 팽팽히 캥겨드는 영혼의 시울.

신부님 입당싱에울려 퍼지던 성가의 메아리가 사제강론말씀의 여운과 함께 내 가슴 깊이깊이 배음(背音)으로 깔린다.

『임하소서 다윗이여! / 천국 열쇠를 가지셨으니/죄인들을 용서하사/천국의 문 열으소서』

눈물이 핑그르르 이슬되어 맺힌다.

웬일까? 이날 따라 저분(사제) 말씀이 이토록 느끼움은.

『하느님은사람이시다. 사람이신 그분을 믿는 우리도 사람이어야 한다. 소금이 짠 맛을 입으면 무엇에다 쓰겠느냐. 제아무리 수계 범절 성인같이 잘 하여도 사람없이는 아무 소용 없느니라. 가서 배운대로 애덕을 실천하라.』

그런데 어떠한가, 나 라는 위인은. 고작해야 기복(祈福)신앙에 시력마저 무디어 자신의 안일과 루사만을 빌어오던 탐욕스런 나. 명색 오천 신도의 대표임을 자처하는 주제에 타인의 아픔 한번 나눠 갖지못하는 이 위선의 무관심. 노상 십자가의 무게만 저을질하며 이 짐 덜리합소사 사래덕는 이 미련. 지금 당장 주님께서 단죄(斷罪)의 목을 돌이라 하신대도 무슨 낯빛으로 자신을 호도(糊塗) 하랴. 세모에 앉아 한 해를 돌이키니 그저 죄스럽고 따름인것이다.

헌데, 우리네 사제들은 어떠한가. 요즈음 새삼 나는 이부들의 사랑에 감축을 드리면서 우리가 친히 모시는 두분 신부님의 사랑의 행적을 여기 대충 적음으로써 장차 나의 신앙의 지표로 삼았으면 하는것이다.

두분께서는 한 두달거리로 본당에 오신 새 사제들로서 서로 다른 처지요 국적 또한 다르신데 묘하게도 사목적취향만은 그 궤(軌)를 갈이하여 늘 빈자(貧者)의 텃이되어 살기를 즐기신다.

이리하여 두분 사제께서는 가끔씩 누구도몰래「시몬의 집」이나 영아원 같은 불우단체에 사랑의 선물을 나눠주기도 하고 허빈(虛貧)한 근로청소년들의 벗이되어 드린다.

그리고특히「빠리」외방전교회 소속인 우리 보좌 임신부님은 신도를 간에 성인신부로 추암을 받을 만큼 천진하기가 어린애 같고 따라서 전혀 물욕이 없으시다.

그러기에 어쩌다가 선물로 받는 웃가지나 일용품이 손에 들을 양이면 그 즉시로 이웃에게 나눠준다는 자자한 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분은 언제 보아도 단벌 옷에 단벌 구두, 제의(祭衣) 또한 단벌이시다. 이러한 이분의 청빈 생활은 일체의 치장도 세간도 없는 사제실의 썰렁하고 허통한 분위기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한편 우리 두분 신부님께선 언제나 사목일선에서 영일이 없으시다. 그토록 흔한 승용차도 갖기를 거부하는 두분께서는 오락도 취미도 속기(俗氣)마저 버린지 하마오래이신 분같다.

특히 주임 안신부님의 경우, 하루를 온통 사목적 일과로 토막토막 재단해 놓으시고 단 한치의 어김도 없이 이를 착착 실행에 옮기신다. 그러므로 영적인 업무일체는 모름지기 사제이신 당신 홀로의 손에 의해 진행이 되며 심지어 본당 내의 시설이나 영선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손이 아니 미치는데가 없다.

이런 두분 사제인지라 지난 번 신자 가정방문 때에 보여주신 가히 초인적인 성력은 우리 본당사에 길이 남을 화제요 미담으로 기록될 것이다.

방문기간 일개월, 대상세대 팔백여, 매일 이십 여세대씩을 그것도 야간에만 순방하시던 그 정성, 그 봉사는 진하실 수 있는 사랑의 행각이셨다. 그 무렵 나도 몇라례 두분 신부님을 수행한바 있거니와 초겨울의 싸늘한 날씬데도 비지땀을 흘리시며 오르내리던 그 침침하던 비탈길, 계단길이 아직도 내 눈앞에 선하다.

무엇이 이분들을 이 길에 서서 그토록 겨운 십자가를 지고가게 하시는지.

이런 불가사의를 우리가 풀지않고 그냥 건성으로 보아만 넘긴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심히 부끄럽고 몰염치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셨도다』하신 신앙의 고백담이 우리네 일상가운데 뿌리를 내리지 아니하는 한, 우리의믿음도 구원도 모두가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닐까.

나는 수년전 소록도 국립나병원에서 만신창이인 나환자의 환부를 맨손으로 어루만지던 젊디젊은 벽안(碧眼)의 두분 수녀님을 뵈온적이 있거니와 그 거룩하고도 숭고한 봉사심이 어떻게 그 영약한(?)여심에서 우러나게 되는지 아직도 그 기적 같은 사랑의 손을 못잊고 있다.

우리가알고있는 저무수한성인과 성녀들. 그리고 특히세말적 근대와 현대사에,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병든 시민정신에 찬란한 빛이시던 다미안, 꼴베, 마더 데레사 같은 분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한 기막힌 용덕은 우리네 탐욕스런 속중(俗衆)한 사랑의 극치 그것인 것이다.

이 밖에도 신적사람을 살다가신 유명 두명의 은인들이 이땅에 상존해 있음으로써 오늘 이 무너져 내리는 인류의 정신사가 간신히 그 명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대립 3주일. 오늘 나는 저무는 들창에 앉아 지난 일년을 돌이키며 통회에 젖고 있다.

황량한 겨울들판으로 추방된 나의 아픈 영혼이 방향을 잃고 서성이는 뒷모습을 가련한 내 눈빛으로 지켜보면서-.

이제 어김없이 새해가 오고 우리주 탄생하며 새역사의 수레를 이끄실 것이다.

이럴 때 내 기쁨과 환호로써 그들 동방박사의 하례를 받으며 계실 그복된 자리에 아기 예수 뵈오러갔으면 싶다.

다행히 나에게도 주님 자비가 베풀어지신다면 돌아온 탐자처럼 눈물 펑펑 쏟으며 사랑이신 그품에 안겼음싶다

그리고 새해에는 철이든아이답게 가끔은 빈자의 벗이 되고 촛불이 되어 스스로를태우며 작아져 가야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주님사랑의 공동체안에 안주하고 동참하는 나였으면 더욱 좋겠다.

홍준오 시인ㆍ금호동 본당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