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복음화의 현장] 1. 신림동 본당편

이윤자 차장
입력일 2011-05-02 수정일 2011-05-02 발행일 1980-04-06 제 119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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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한다
알찬교육으로 신앙의 불 점화-내실다지고 봉사하는 모습 구현
세대주 모임과 반조직을 강화-가정성화ㆍ전교ㆍ사랑실천 유도
하느님나라의 확장-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至上사명이다。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회의 그리스도化ㆍ福音化를 위해 우리교회는 잠시도 寧日이없다。본사는 지난 77년부터 3년간에 걸쳐 모든 복음화작업을 입안하고 점검하는 각 교구의 「福音化의 産室」을 소개한데 이어 이러한 계획에 따라 사목일선에서 뛰고 있는 「福音化의 現場」에 뛰어들어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본당ㆍ단체의 활동을 통해 福音化작업의 虛像과 實像을 진단해보기로 한다.

<편집자>

78년 5월 신림동본당(주임ㆍ김득권신부)은 본당관할내 전가정의 세대주를 대상으로「세대주모임」을 실시했다。이 특이한 형태의 모임은 본당이라는 공동체에 보다 강하게 신앙의 불을 지르기위한 신림동본당 나름대로의 자목적 포석이었다.。이 세대주 모임을 통해 신림동본당은 예견했던 바대로 아니 그 예견을 훨씬 상회하는 결실을 획득함으로써 앞서가는 교회 모습을 구현하는 본당대열에 합세했다。

이미 교육을 받아드릴 준비태세가 완비 되어있던 신림동본당에서 본당신부가 제안하고 全신자가 호응한 세대주모음은 본당공동체의 활성화를 향한 다른 시도들과 함께 복음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신림동본당은 1969년 9월 30일 수도 서울대교구의 60번째 성당으로 설정, 지난해 본당설정 10주년을 맞았다。본당설정당시 불과 5백여 명이던 신 자수는 10여 년 동안 10배로 불어나 현재 신림동본당은 서울 교구 내 1백3개 본당중 15번째의 규모로 성장했다。관악구 신림동 92~32번지 야산언덕바지에 아래로는 하천을 낀 전형적인 서울 외곽지대 성당으로 자리 잡은 신림동본당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파란 많은 성전건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온갖 고초와 시련 속에서도 당시 위풍당당한 성전을 가질 수 있었던 신림동본당 신자들의 의지의 역사는 본당이 설정되기 3년 전인 66년부터 시작됐다。

66년 서울지역의 철거민들이 변두리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천막촌내에 「천주교신자모이라」는 광고가 나붙으면서 모인 신자2백여 명이 손수 블록을 쌓아 35평짜리 가건물을 세웠던 것。

그러나 이 공소 건물은 69년 폭설로 주저앉아버렸고 신자들의 갈 곳 없는 유랑생활이 시작됐다。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들은 교구는 69년 5월 현재 성당건물자리에 대지 4백40평을 구입해주었다。그해 8월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부임한 초대 최서식 신부와 함께 신자들은 두 번째의 성당을 지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신자수를 감당할 수 없었던 72년 2대 김성대 신부에 이어 김승훈 신부가 부임했다。김 신부는 부임 즉시 대망의 성전건립공사의 삽을 들었다。

불과 6백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건평3백80평 총공사비 3천만 원을 헤아리는 성전건립에의 도전은 차라리 무모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성전을 갖고자하는 신자들의 바람과 밀고 나가는 본당신부의 투지가 하나로 뭉친 결실은 76년 초 그 첫열매를 맺었다。실로 억척스럽게 물고 늘어진 신자들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었다.。

4년의 세월동안 신림동본당은 대신학교 구건물의 철거를 맡아 벽돌과 목재를 헐값에 구입, 문틀 지붕받침으로 사용하는가하면 철근은 팔아 기금에 보태는 등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물론 이들의 눈물겨운 결실 속에는 교구 내 많은 본당과 교구자체의 지원이 무엇보다 값진 열매로 포함됐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굳센 의지로 버텨온 신림동본당은 그 고난과 역경을 탄탄한 바탕으로 성숙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난은 서로 돕고 친 힘 앞에는 무력하다」는 큰 교훈을 몸으로 체험한 신림동본당 신자들은 77년 4대주임 김득권 신부를 맞으면서 복음화를 향해 조심스런 첫발을 내디뎠다。

신림동본당의 신자증가수는 일반적인 신자증가율에 비해 월등히 높은 증가폭을 기록하고 있다。이 증가추세는 75년 서울대학종합캐퍼스가 근처에 들어서면서 자연적인 인구 이동에 따른 현상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완전 無에서 有를 창조해낸 신림동본당특유의 억척스러움과 투지 그리고 일체감으로 뭉친 신자들의 신앙심이 지역사회 안에 크게 부각 됐기 때문으로 분석해 분수 있다 。

본당의 비대화에 때를 맞추어 부임한 김득권 신부는 우선 全신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 본당공동체의 활성화라는 숙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신자수가 늘어나는 속도만큼 신자상호간의 연대의식이 뒤따를 수 없었던 여건에서 어느 정도 안정권에 돌입한 77년 당시 신림동본당의 상황은 어떤 형태의 교육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임신부는 기초조직인 반조직강화를 단행했다。기간을 설정, 정기적으로 실시한 구역반장교육은 신자개개인과 본당이 개별적인 연결이 어려웠던 여건들을 말끔히 해소, 반조직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활성화에 밝은 전망을 제시했다。

이어 시도된 것이 세대주모임。주임신부가 제안하고 사목회가 기획한 신림동본당의 세대주모임은 신자사이의 융화는 물론 냉담신자들의 열성회복, 본당활동 적극 참여는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강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관할지역별로 4차례로 나뉘어 실시된 세대주모임에는 2백50여세 대 세대주가 참가, 본당공동체의 활성화를 내건 본당 목표에 확고한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맛보게 한 이모임은 매차 끝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친목단체를 결성, 현재 요셉회(신림1동) 삼성회(신림2ㆍ6동)베드로회(신림4동) 바오로회(신림5동ㆍ봉천1동)등 4개 단체가 매월1회 「세대주 우정의모임 」을 개최, 서로의 신앙생활을 교환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이성과는 참가자들의 열성과 함께 주임신부의 적극적인 배려를 비롯하여, 교육준비에서부터 진행과 뒤처리를 맡은 본당 사목해 및 라우렌시오회 안나회 성모성심회 마리아회 애덕회등 기성단체들의 희생적인 봉사가 조화를 이룬 값진 열매였다。

세대주모임으로 복음화를 향한 새로운 시도에 자신을 얻은 신림동본당은 지난해 전여성신자들을 대상으로 연령별연수회를 개최했다。세대주모임과 마찬가지로 미니 꾸르실료방법을 도입, 신앙의 쇄신에 초점을 맞춘 이 교육에는 무려 7백여 명의 여성신자가 동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세대주의 신앙 강화가 가정성화의 관건이라고 본 본당의 판단이 그대로 적중한 결과였다。

이 같은 성과를 놓고 주임 김득권 신부는 『신자들의 저력』때문이라고 서슴없이 지적했다。

김 신부는 『전임신부들이 교육을 할 수 있는 발을 이 구어 놓았기 때문에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지적하면서 신자들의 진취적인 태도와 단체 간의 협동 및 이해가 신림동본당의 저력이라고 평가했다。

신림동본당은 이미 76년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돕겠다는 의지하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임」을 조직,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기틀을 다져왔다。뿐만 아니라 성전건립이 한창이던 74년 서울교구에서는 최초로 교무금제도를 과감히 폐지, 주일헌금만으로 본당의 제반운영을 이끌어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위한 방안으로 채택된 교무금제도 폐지는 약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신자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지속, 신림동의 특색으로 정착하는 과정 중에 놓여있다。신림동 본당의 올해 주력사업은 짝신자 발굴 신자계속교육과 함께 사랑실천 전교활동기도의 생활화 등을 올해 사업목표로 설정한 신림동본당은 이미 교적확인 등으로 짝신자발굴을 위한 제반준비를 완료했다。또한 세대주 모임후 속교 육으로 MAW를 도입, 신자계속교육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는 총회장 崔常善(마르띠노·66세)씨는 『신림동의 장점인 신자계층의 평준화가 신자들의 결속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면서 『현재 신림동 신자들은 함께 뛰면서 일한다는 정신으로 무슨 일이든지 참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본당자치운영을 내걸고 신자들의 사목활동우대를 최대로 배려한 주임신부의 열의와 「일하는 사목위원」으로 실제 사목활동에 전념하는 사목위원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신자들의 단결과 일치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신림동본당은 오늘도 복음화를 향해 크고 높은 이상과 뜨거운 집념을 불태우고있다。

이윤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