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안영의 초록빛 축복] 성취를 바라는 나의 소망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2011-04-17 제 274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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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한 배려인가? 자기를 위한 배려인가?”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자꾸만 일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저만의 정서일까요? 지진에, 해일에, 설상가상으로 방사능 오염까지 겪으면서, 누구보다 혹독한 광야 체험을 하고 있을 피해 주민들! 그들을 생각하면, 편안히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감사를 넘어 황송하기조차 합니다. 인류가 지구촌이라는 거대한 공동체 안에 사는 한, 한쪽의 지체가 아프면 다른 쪽이라고 어찌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우리나라는, 재앙을 당한 세계 도처에 물질뿐 아니라 119까지 보내 도움을 줄 수 있어 민족적 자긍심을 느낍니다. 특히 이번 일본의 경우에는 온 국민이 합심하여 더욱 발 빠르게, 강도 높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지요. 예컨대 지난 3월 22일 저녁 KBS에서 열렸던 ‘희망 음악회’는 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데 좋은 몫을 했다고 봅니다. 그날 일본 대사가 직접 나와서 능숙한 우리말로 감사의 인사를 할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한류 스타들의 활약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동안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니 그럴 만하지요.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우는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여린 꽃봉오리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평생을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그분들. 팔순 넘은 노구를 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과를 요청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분들. 세월이 흐르다보니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가, 증오와 원한이 더욱 쌓였을 그분들이 진심 어린 마음을 모아준 행동은 엄숙하기조차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확실히 정이 많습니다. 정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우리 민족은 분명 선한 민족입니다. 5000년 역사상 수백 번의 외침을 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외침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 그것만으로도 착한 민족성의 입증은 충분하지요. 거기에 비하면 일본인은 냉철하다 할까요? 이성적이다 할까요? 언론은 이번 일에서 그들의 침착하고 질서 있는 대응을 치하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 받은 때문이라고.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일본이 개인적으로는 남을 배려하기로 소문난 나라인데 왜 국가적으로는 타국에 대한 배려가 없을까요. 이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모처럼 선린 관계가 무르익는 이 시점에서 또 독도 문제를 거론했어야 할까요. 게다가 한 마디 통보도 없이 방사능 오염 물질을 바다에 방출했어야 할까요. 온 국민이 보인 따뜻한 우정에 찬물을 끼얹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조는 계속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대응은 더욱 돋보입니다만.

따지고 보면 일본은 우리나라에 감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백제시대부터 흘러들어간 문화예술에서부터 임진왜란 때 흘러들어간 문물, 게다가 한국전쟁을 통해 일군 부(富)! 그런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국익을 챙기려 들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켜주지 않으니 원망스럽다는 것이지요.

제게는 요즈음 자꾸만 떠오르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2000년 3월, 바티칸 미사에서 ‘기억과 화해’를 낭독하며 과거 가톨릭이 저지른 온갖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목멘 소리로 인류를 향해 외치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그리고 1970년 폴란드 방문 중,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던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 그분들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용기를 떠올리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일본이 하루 속히 희망의 땅으로 솟아올라 이웃을 통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를. 그리고 과거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해당 국가에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좋은 이웃으로 거듭나기를.

미사 중 일본 돕기 2차 헌금을 내면서, 텔레비전을 통해 일본 돕기 유료 전화를 걸면서 빌고 또 빌어본 저의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