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3)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6)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입력일 2011-03-23 수정일 2011-03-23 발행일 2011-03-27 제 2739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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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다
수도원 해산·교회재산 강탈 등 혼란의 유년기
어렵게 사제품 받고 41년간 아르스본당 사목
이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형성의 장’(하느님께서 형성되도록 만드신 그 세계) 안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보자. 비안네는 1784년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선량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면서 소년 비안네는 연민의 덕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안네가 4살이 되던 해에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진다. 프랑스대혁명(1789년)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당시 시대상 안에서 하느님이 비안네를 통해 교회를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에서 1794년까지 5여 년 동안 일어난 혁명이다. 중세의 봉건사회에서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당시는 산업자본가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과거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영주가 모든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산업화가 이뤄지고 기계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산업가로 부를 축적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나게 됐다. 이들과 과거 봉건 사회에서 억압받았던 농민 등이 봉건 영주와 교회의 성직자들이 가졌던 특권들을 빼앗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대혁명의 핵심이다.

물론 당시 상황을 보면 교회 자체도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가 재정이 아무리 궁핍해도 교회는 세금 납부 의무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엄청난 특혜 속에서 교회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일부 성직자들의 부와 사치도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다. 당연히 부족한 재정은 농민과 서민들이 채워야 할 몫으로 돌아갔다. 농민과 일반 시민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유 평등 평화를 부르짖으며 일어난 것이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농민 봉기 등이다.

비안네는 상당히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것이다. 사회적인 혼란뿐이 아니었다. 당시 교회도 큰 고난을 받았다. 혁명 정부는 신앙인이 내야 했던 10분의 1세를 폐지했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지지를 얻었다. 정부는 또 교회의 면세 특권을 없애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국고로 귀속시켰다. 수도원을 해산시키는가 하면, 프랑스 교회를 로마에서 분리시켰다. 심지어는 1793년 그리스도교 국교화 폐지를 선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태는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하고 나서야 국가와 종교간 평화협정을 통해 겨우 진정되게 된다.

비안네는 수도원이 폐지 당하고, 성직자들이 체포돼 감옥에 구금되는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신앙생활을 드러내고 하다가는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안네는 깊은 신심과 기도생활 안에서 성소의 길을 결심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하느님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비안네를 사제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머리 똑똑하고 큰 일만 하려는, 대단한 학문적 재능이나 사업적 수완을 가진 사제가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마음이 뜨거운 사제를 필요로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던 많은 신앙인들의 눈물을 닦아줄 그런 사제가 필요했다. 하느님은 그런 사제로 비안네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종교 자유가 찾아왔고, 이제 비안네도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암담한 상황이 발생했다. 본당신부님이 비안네를 가만히 보니, 그릇이 큰 아이였다. 늘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등 다른 아이들과는 남다른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본당 사제는 직접 비안네에게 사제 교육을 시켰고, 신학교에 입학도 시킨다.

그런데 정작 비안네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탤런트가 달랐다. 공부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학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비안네는, 학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당연히 퇴교감이었다. 그런데 학업만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 있어서 모범생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고난 중에 더 큰 빛을 발한다. 어려운 과정을 이기고 비안네는 겨우 29살때 사제품을 받았으며, 보좌신부 생활을 거친 후 아르스라는 아주 작은 시골에 본당신부로 부임했다. 비안네는 이 본당에서 33세부터 73세까지 41년 동안 사목했다. 이제 이 본당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