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3년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특집]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듣는다 (16) 신학생 지원에 대한 관심

정리 이우현 기자
입력일 2011-03-23 수정일 2011-03-23 발행일 2011-03-27 제 273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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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모으기 운동으로 신학생 양성기금 마련
교구 운영을 위해서는 인력이 가장 절실했지요. 특히 사제 양성이 긴급하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신학생들과 자주 만나고, 산행도 함께하는 등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됐지요. 하지만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적 기반이 부족했기에 신자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어요.

내가 평양교구 신학생일 때 기억을 떠올리게 됐지요. 당시 교구장이셨던 홍용호 주교님께서도 신학생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셨어요. 신학생을 참 귀하게 여기시고, 가까이 하셨지요. 신학생들도 방학 때가 되면 매번 평양에 와서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했어요.

이러한 관심은 신학생 양성의 큰 활력소가 됐지요. 교구에서 ‘우리 신학생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신자들을 계몽하고, 각 본당 혹은 단체에 신학생 교육비 지원을 배당하기도 했지요.

그 당시 평양교구는 신부 수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어요.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평양교구의 미국인 메리놀회 신부들을 모두 얼마동안 억류했다가 본국으로 강제 송환했어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맞교환하기 위해서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 앞바다에서 양쪽 송환선이 만나 서로 배를 옮겨 타게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지요.

이후 평양교구에는 소수의 한국 신부만 남게 됐고, 급히 타 교구에서 한국 신부 몇 명이 임시로 파견돼 오기도 했지만 신부의 절대수가 여전히 부족해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제양성이 시급했지만 신학생 교육을 위한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지원마저 다 끊겼기에 참으로 교구의 앞날이 캄캄했지요. 어쩔 수 없이 우리 신자들이 신학생 양성 비용을 거두는 데 발벗고 나서게 된 거예요.

신학생 시절 이러한 경험을 우리 수원교구에도 적용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신자들에게 도움을 호소했어요. 장금구 신부의 의견을 반영해 ‘매끼 한 숟가락씩 성미 모으기 운동’을 전개했지요. 각 집마다 쌀모으기 운동을 위한 쌀자루를 따로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이를 통해 신학생 양성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김대건 신부님의 어머니 세례명을 딴 ‘우슬라회’도 서울에 사는 평안도 출신 여교우들이 모여 수원교구 신학생 지원을 위한 단체를 설립한 것이지요.

1972년 12월 16일 수원교구 사제서품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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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