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2]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5)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입력일 2011-03-16 수정일 2011-03-16 발행일 2011-03-20 제 2738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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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이상 고해소서 살아
한 평생 교리·고해성사 등 신자들 위해 투신
1856년 73세의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기다
비안네 신부는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고, 강론을 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며, 온힘을 다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쉬는 신자들이 문제였다.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심이 깊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조차 모르는 쉬는 신자가 허다했다. 마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퇴폐적인 춤과 술에 빠져 살았다.

비안네 신부는 이 같은 풍습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비안네 신부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내며 열성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몇 년 후 아르스 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성사에 대한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이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피정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고해성사 사제가 부족했다. 결국 비안네 신부에게도 고해성사를 도와 달라는 요청이 왔다. 한겨울에 9km를 왕복하며 이뤄진 고해성사는 ‘고행성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이때 고해자들은 비안네 신부를 통해 죄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몇 주일 동안 계속된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고해소가 넘어져 부서질 정도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한 번은 한 신자가 비안네 신부를 쉬게 하기 위해 고해소로 갔지만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정에 찾아가도, 새벽 2시에 다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이 신자는 완력으로 신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고해소 문을 열고 신부를 모셔 나올 수 있었다.

이후 비안네 신부는 선종할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했다. 아르스 마을 기록에 따르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 명에 달했다. 비안네 신부가 고해소를 나갈 때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해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비안네 신부의 수단자락을 끌어당기고, 어떤 이들은 또 옷을 찢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고해성사에 임했다.

여기서 50대 비안네 신부의 하루 일과를 보자. 그는 대체로 자정과 새벽 1시경에 고해소로 갔다. 그리고 새벽 6시 혹은 7시에 고해소에서 나와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간단한 식사를 하고 다시 고해소에 들어갔고 오전 10시쯤 다시 나와 성무일도 기도를 바쳤다. 11시에 교리를 가르치고 성당에서 나와 사제관에 가서 각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다시 고해소로 향했다. 고해소에서 나오는 시간은 저녁 7시 혹은 8시. 이후 비안네 신부는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고, 강론대로 올라가 강론을 했다. 강론을 마친 후 약 9시경이 되어야 비안네 신부는 비로소 혼자가 됐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그는 선종할 때까지 하루 평균 2~3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않았다.

농부의 아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돼 점점 쇠약해졌다.

73세가 되던 1859년 6월,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를 바쳤다. 사제관에 돌아온 그는 의자에 쓰러지고 말았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 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사제관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부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하늘로 오르던 날, 아르스 마을 사람 모두가 울었다.

정영식 신부 (효명고등학교 교장),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