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3년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특집]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듣는다 (9) 수원교구청

정리 이우현 기자
입력일 2011-01-26 수정일 2011-01-26 발행일 2011-01-30 제 273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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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총대리·비서 직원은 모두 셋!
당시 교구청 생활로 돌아가 보지요.

교구청 건물은 고등동성당 맞은편 집(주교관 겸 교구청으로 사용)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앞에 있는 또 다른 집을 하나 더 얻어 넓혀나갔어요. 사실 주교관에 들어간 내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랑 책 정도이고, 다른 것은 없었어요.

그때 고등동본당 전교 수녀님들(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중 유치원 담당이시던 우슬라 수녀님의 권유로, 착좌식에 오셨던 강 아오스딩 수녀님을 주교관 담당 수녀로 보내주도록 관구장 수녀님께 청해 허락을 받았어요.

강 아오스딩 수녀님은 우슬라 수녀님과 함께 내 고향 진남포(북한 평안남도 남서부 도시)에 계셨던 분이라 참 편안했어요. 옛날 어린 시절 소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학교에 들어가라고 누구보다 먼저 권해주셨던 분이기도 해요. 그런 분이 주교관에 파견 나와 계시니 더 도움이 됐어요. 본당 수녀님 두 분 중 한 분인 우슬라 수녀님도 진남포에 계셨었어요. 그 수녀님들께서 주교관 살림을 다 해주셨어요.

그리고 당시 총대리 신부는 ‘총대리’라고 부르지 않고, ‘부감목’이라고 불렀죠. 그때는 교구에 총대리직을 전임하는 신부를 따로 둔 교구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아마 모두 본당 신부가 겸임했었지요.

난 총대리를 전임하는 신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까이에서 총대리 신부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내가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잠깐 있었던 것 외에 본당 신부로 지냈던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명동본당 보좌 생활 이후에는 포로수용소에서 전교하다가 소신학교 교사 신부로 1년간 사목했고, 유학도 갔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로도 일했어요.

주교로서 한 교구를 운영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특별히 경험이 많은 총대리 신부의 도움이 필요했지요. 바로 장금구 신부님(북수동본당 주임)이 적임자셨어요. 장 신부님은 내가 사제품을 받고, 처음으로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임명받았을 때 명동본당 주임신부로 계셨던 바로 그분이었어요. 당시 장 신부님도 고등동성당 사제관을 쓰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주교관 앞에 작은 집 하나를 빌린 다음에는 주교관에 함께 사셨지요.

또 수원교구 출신의 손태섭 신부님께서 프랑스 유학 후 돌아오셨을 때 비서신부로 임명했지요. 당시 직함은 ‘상서국장’이었어요. 사무처장의 역할과 비슷했어요. 비서 역할도 함께 했어요. 프랑스어 편지를 써주었고, 타이핑 같은 것도 다 비서신부가 했지요.

처음에는 교구청 직원이 나, 총대리 신부, 비서 신부 이렇게 셋뿐이었어요. 단출한 살림이었지. 인사 발령은 1월이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교구청 살림’은 시작된 것이지요.

강 아오스딩 수녀(오른쪽 두번째)와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과 함께한 윤공희 대주교(오른쪽 세번째)가 수원 고등동 주교좌성당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