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이 봄, 너무도 아픈 죽음들이여

입력일 2010-04-07 수정일 2010-04-07 발행일 2010-04-11 제 2692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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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순교의 모범이신 그분 부활의 은총으로 고인들에게 안식이 있기를”

올봄도, 아니 여느 해 봄보다도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소식보다는 고통스럽고 슬픈 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달구고 있어 궂은 날씨와 더불어 마음을 신산스럽게 한다. 입에 다 담기도 부담스러우리만치 황당한 사건들이 펑펑 터지고 있는데 그 갖가지 사건들을 관통하는 요소가 ‘죽음’이다. 그중에서 희생 규모와 관계없이 내 마음에 떨치기 어려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모스크바 연쇄 자살폭탄테러와 연예인 C씨의 자살 소식이다. 전자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타에 대한 동시 위협이란 점에서, 후자는 인간 의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자기 포기의 사례란 점에서 그러하다.

세상의 고결한 죽음 중에는 남을 위해 대신 죽는 죽음 외에 신념이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는 죽음이 있다. 이른바 순교라는 것이 그것일진대, 최근 일어난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테러 사건은 무고한 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폭력이 순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이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그 사건이 체첸의 여성 테러단체 ‘검은 미망인’의 소행으로 추정되면서 호도된 종교적 신념이 초래하는 눈먼 폭력의 비극성과 위험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기는 하다. 처음에는 러시아군의 손에 남편, 자식, 형제자매 등을 잃은 보복심에서 테러 활동에 가담했던 그녀들이다. 이후 분리주의 세력의 선동에 세뇌되어 테러의 명분을 종교적 신념으로 품게 된 ‘검은 미망인’들이 자폭 테러를 감행할 때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순교의 정신으로 그렇게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통탄할 아이러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순교자들을 기리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공동체의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갈파했다. 어떤 집단에 응집력과 결속력이 건재하는 것은 ‘골고타의 언덕’ 같은 선구자들의 고난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행한 시기에 사람들은 잘 단결하는 반면 행복한 시기엔 오히려 분열하는 경향을 보이듯이, 연대의식은 기쁨이 아닌 고통에서 생긴다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끔찍한 고통과 슬픔을 맛본 ‘검은 미망인’들을 순교요원으로 이끌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공통의 불행을 부단히 환기시키고 조직의 목적을 위해 희생된 순교자를 우상시함으로써 그들 공동체의 목표의식은 더욱 공고해지고 자기희생의 성스러운 명분은 확고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여인들은 검은 베일 속에 폭탄을 친친 감고 부나방처럼 ‘적진’ 속에 뛰어들었으리라.

오호통재라! 문제는 그들의 ‘성스러운 순교’가 그들에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후손들에게 대물림될 거라는 사실이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불화가 불화를 키우니 어떤 형태로든 타인의 희생을 동반하는 순교는 더 이상 순교일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자살도 마찬가지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다치게 하는 그 선택은 본인이 의도하든 안 하든, 일정한 파괴의 에너지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민과 동정에 쏠린 나머지 이해의 미명 아래 그것을 감상적으로 수용하거나 미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C씨의 자살로 말미암아 그 유족은 물론 그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통절한 아픔을 겪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공인인 그가, 역시 공인이었던 그 누이의 비극적 종말을 재현하고 말았으니, 그의 불행 극복을 본보기 삼아 시련의 늪을 헤쳐 나오려 했던 동병상련의 많은 대중들이 얼마나 좌절감을 느끼겠는가. 불행의 파장은 의외로 빠르게, 또 멀리 퍼져 나가는 법이다.

이 계절, 참으로 아픈 죽음들 앞에 모두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하지만 기도하자. 그분, 희망의 삶을 위해 참 순교의 모범을 보이신 그분 부활의 은총으로 고인들에게 부디 안식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