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8. 권철신 (2)

입력일 2010-03-23 수정일 2010-03-23 발행일 2010-03-28 제 2690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모진 고문에도 신앙 지키다 순교
입교 후 온 마음을 다해 복음전파에 헌신한 녹암 권철신은 체포되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고문을 받다 순교했다. 사진은 권철신 묘 전경.
권철신 성현은 입교하기 전에는 망설였지만, 입교한 후부터는 온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입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신망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녹암 선생님 형제분들이 믿는 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종교”로 확신하게 함으로써 광암 이벽 성조의 선택과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권철신 성현은 직접 나서서 전도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천주교회의 운영에도 결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도를 닦는 고승들처럼 초연하게 기도와 참선을 즐기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권씨 가문은 박해 세력의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본래 이름있는 집안이 천주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과 박해도 역시 대단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791년의 진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동생 직암 권일신 성현이 모진 형벌과 참혹한 고문 끝에 귀양 길 첫 주막 밤에 뒤따라간 자객에 의해서 거룩히 순교하게 되자, 이 박해로 전라도의 여러 유력한 교우들도 순교하여, 천주교회 지도계급의 손실이 컸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던 정씨 집안과 권철신 암브로시오 성현만이 천주교 신앙인으로 존재하는 듯했었다.

기미년(1799),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 성현과 정약종 성현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 하여 정조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상소를 올린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천학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박해자들은 다시 경신년(1800) 5월에 다시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양근 고을에 사학이 아주 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는데, 군수는 태평으로 들어앉아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그 군수를 징계해야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관에서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므로 양근군수를 인책 사퇴시켰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과거지사를 들춰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므로, 녹암 권철신 성현은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 가두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녹암공을 불러 가려고 하였으므로, 사건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다.

또한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그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던 남인학자들에게 관후하여, 일말의 광명을 주었던 정조 임금이 1800년에 승하하자, 정조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와 기회를 만난 노론 벽파의 박해자들은 신유박해를 일으켜서, 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 성현과 선암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만천 이승훈 베드로 성현 등, 남인 학파 양반들을 전부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마침내 성현도 1801년 음력 2월 11일 경에 체포되시니, 재판관들 앞에 끌려나가서도 천주교와 그 신앙 실천에 관해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을 당하면서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박해자들은 65세의 신선과 같은 대학자를 형조에서 형을 다스리며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참혹히 때려 마침내 음력 2월 25일 모진 매질 아래 순교하시게 하니, 성현과 천주교회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