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7 권철신 (1)

입력일 2010-03-16 수정일 2010-03-16 발행일 2010-03-21 제 268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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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성조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문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 명성을 날린 권철신은 이벽 성조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한다. 성화는 권철신이 손님을 맞는 모습(탁희성 작).
녹암 권철신 성현은 권일신 성현의 맏형으로 1736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건국 공신이며, 주자학자였던 권근의 후예로 명문대가의 자손이었던 성현은 5형제가 모두 지식과 덕망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당시 양반이면 누구나 속해 있었던 남인 대가의 자손으로서 성현은, 경학과 예학에 있어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 경서의 철리와 윤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냈으며, 일찍이 이벽 성조께서 한국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교로 삼고자 선택한 분이셨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동생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을 양자로 삼았고, 해박한 학식에 못지 않게 덕행이 또한 놀라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훗날 광암 이벽 성조께서는, 녹암과 직암 즉 권철신·권일신 학자들과 그 주위의 선비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면 따라오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라 하며 성현을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고 한다. 1779년 겨울, 성현께서는 정약전이 주선한 천진암 강학회에 지도자 겸 주제 강연자 격으로 참석했었는데,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모임은 아니었고, 흔히 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학문 연구를 위하여 종종 개최되곤 하였던 그런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 이벽 성조께서 참여하시면서부터는 유교적인 강학회가 아닌, 천주교 교리연구와 일부 신앙 실천의 계기가 되는 강학회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녹암 성현께서도, 광암 이벽 성조의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논증을 통하여 천주교 교리를 대강 알게 되었는데, 성현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로 인해 천주교 신앙을 즉시 실천하지는 않았다.

광암공이 참여한 천주교 교리 논증과 관련된 천진암 강학회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에는 1777년 정유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학술의 이벽전에는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정약용은 1779년 기해년 겨울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한 것은 1779년을 전후하여 광암 이벽의 천주교 교리 논증 강학이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니, 이는 제5대 조선교구장이던 다블뤼 주교가 그의 저서에서 진솔하게 논파하였고,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약사」에서 ‘이벽박사의 위대한 강학’을 한국천주교회의 자발적인 교회창립의 출발로 적고 있다.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녹암 권철신 성현께서 이벽 성조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논증을 듣고 알고 믿음을 가졌다하더라도 그것과, 이를 즉시 실천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강학회 당시 연령을 보면 녹암 권철신 43세, 광암 이벽 25세, 이승훈 23세, 정약전 21세, 정약종 19세, 정약용 17세 등이었는데, 권철신 성현께서는 이미 저명한 대학자의 위치에 있는 양반대가의 맏아들이었으므로 유교의 관례상 조상 제사를 비롯한 갖가지 문제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주저했다기보다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784년 가을, 광암 이벽 성조께서 말을 타고 양근에 와서 녹암공을 입교시키고자 10여일간을 머물면서 토론을 겸한 전도활동을 하였을 때 마침내 동생 권일신 성현의 뒤를 따라 권철신 성현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