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교회 창립 선조를 찾아서] (15) 권일신 (3)

입력일 2010-03-02 수정일 2010-03-02 발행일 2010-03-07 제 26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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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문에도 굳건히 신앙 지켜
권일신은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여러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사진은 권일신 관련 탁희성 작품 성화.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는 권일신 성현을 비롯한 한국교회 임시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선 천주교 신앙으로 불러 주시는 천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께 불멸의 감사를 드리라고 조선의 신입교우들을 권면하였다. 또한 복음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을 강구하되, 항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등이 비록 선의라 하더라도 함부로 사제성직을 수행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성제를 거행하지 말아야 하고, 세례를 제외한 다른 성사도 절대로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 답장은 모든 의심을 풀어 주었으며, 우리 학자들은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 내용을 받아들였고, 각자는 성직수행 중단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주교에게 목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목자를 얻기 위한 조선 신입교우들의 간청과 미신숭배, 조상공경 등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하여, 북경주교는 학식있고 열성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언약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고 도울 수 있도록,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그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알려 주었다.

이러는 가운데 1791년 전라도에서 뜻밖의 박해가 일어났다.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1785년 을사박해 때는 그 용기와 명성으로 무사하였으나, 신해박해(1791) 때는 반대자들의 질투를 더 오래 피할 수가 없었다. 성현의 이름과 학식과 끊임없는 노력이 새로운 교리 전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진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홍낙안, 목만중 및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천주교의 중심적인 두목인 권일신 성현을 지목하여 고발하였다.

그래서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로 넘어갔다. 관원들은 성현의 뜻을 변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차례 고문을 하고, 항구한 신앙심을 꺾기 위하여 갖가지 특별한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형리들의 혹심한 고문과 태장 밑에서도 분명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에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하여도 주님을 배반할 수 없고 주님께 대한 제 의무를 궐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형벌로 인하여 성현의 몸은 처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을 알고 있고, 그 훌륭한 자질을 높이 평가하던 정조 임금은 천주교의 반대자들이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현의 사형 결안에 서명할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성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설복시켜 보라고 명령하였다. 왕의 명령에 따라, 그 전보다도 더 험한 새로운 고문과 유혹이 권일신 성현에게 가하여졌다. 달램, 아첨, 약속, 종용 따위가, 우정과 동정이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더불어 차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형벌과 고문이 가해졌는데, 성현께서는 박해자들의 위험한 달램을 이긴 것처럼, 고통도 이겼다. 권일신 성현을 사형에 처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제주도로 귀양보내라는 판결을 하게 하였다.

※ 자료출처 : 천진암성지 홈페이지(chonjin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