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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면희 교수의 생명칼럼] 6.미래세대 환경권의 존중

입력일 2008-02-24 수정일 200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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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 물려줄 환경여건 조성하자

오늘의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큰 흐름으로 보면 역사는 다소간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발전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에 따르면, 우리 다음에 오는 미래세대도 우리와 같거나 더 나은 상황에 놓일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 자본주의 문명은 미래를 삭감하는 행보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문명의 미래 잠식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쓸모있는 에너지인 재생 불가능한 자원, 대표적으로 석유 등을 빠르게 소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 자원을 채취하여 사회적으로 사용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을 야기하고, 이것이 지구 생물권과 생태계를 황폐화함으로써 갈수록 인간 생존에 유해한 환경여건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결국 미래세대 인류에게 불리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돌이켜보면 역사는 인간의 권리 신장과 병행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계급 및 인종, 그리고 성 해방운동은 노예와 하층민, 흑인, 그리고 여성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물결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와 생명, 사유재산에 대해 누구로부터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1세대 권리로서 자유권적 기본권이 분별된 것이다.

자유주의 권리는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소극적이다. 나의 권리가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을 배제할 뿐 타인이 처한 불우한 여건을 개선하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부 아이들은 열악한 생활여건에 놓여 있어서 기초교육도 받을 수 없거나 기아와 굶주림으로 내몰리거나 또는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도 못한 채 병마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때 이런 아이들은 사회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초교육과 알맞은 식량, 기본적 의료혜택 등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2세대 권리로서 사회적 기본권이 요청되었다. 이런 유형의 적극적 권리는 사회주의의 영향 속에서 분별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3세대 권리가 운위되기 시작했다. 바로 환경과 평화에 대한 권리가 그것이다. 특히 환경권은 현세대는 물론 미래세대에게도 핵심적으로 중요한 성격의 것으로 부상했다. 인간은 누구나 쾌적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기에는 현세대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내 미래세대에게도 같은 것을 설정하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7년에 UN 산하 세계환경발전위원회(WCED)는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미래세대 인간의 필요 여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세대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으로 정의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1992년에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UN 환경개발회의에서 채택되었고, 2002년에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된 지속가능발전지구정상회의에서 구체적 실행계획이 검토되었다. 따라서 미래세대 환경권은 국제사회에서 공인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환경권을 1세대 및 2세대 권리와 결부지을 때, 미래세대도 두 가지 유형의 환경권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세대는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침해를 입지 않을 소극적 환경권을 지니고, 현세대와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문화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적극적 환경을 갖는다. 따라서 현세대는 미래세대를 위하여 유해한 화학물질 등을 함부로 배출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과학기술의 노하우와 연동하여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사용을 최소화하여 이를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래세대 환경권 존중이 실질적이지 않고 선언적이라는데 있다. 이에 중요한 정책을 시행할 때 그것을 미래세대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미래세대 후견인 제도를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것은 최소한의 것일 뿐이다.

한면희(프란치스코·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