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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5.사회운동가 및 제 3 세계(11)존 F. 케네디 대통령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6-11-12 수정일 200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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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평전을 저술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만인 평등’ 위해 헌신한 인권 대통령

‘가톨릭 신앙’ 토대로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

핵무기사용금지조약 성공해 세계평화 기여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여,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 말고, 우리가 함께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 봅시다.”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 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의 취임 연설 일부다. 1961년 1월 19일, 당시 그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케네디는 세계로부터 주목받는 대통령으로 부상했다.

미국민이 뽑은 최고의 대통령

케네디는 최근 미국 국민 대통령 호감도 설문조사에서도 링컨 대통령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에 재직한 기간은 2년 10개월 남짓. 이렇게 짧은 기간 재직한 대통령이 미국 역사에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길이 기억되는 정치가로 각인된 이유는 다양했다.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기록돼 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도 흑인들의 인권을 존중한 대표적인 대통령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 나설 당시부터 각종 업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그가 ‘가톨릭신자’라는 점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근간으로 세계평화와 사회정의를 실현한 대통령으로 그 누구보다 유명하다.

케네디는 대대로 가톨릭신앙을 이어온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130여년 전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의 종교적 탄압과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혹독한 지배 아래 언어와 민족적 관습 등 모든 것을 포기해야했지만 단 한가지 신앙 만큼은 끝까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청교도들 또한 가톨릭신자들을 극도로 차별했으며,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라틴어로 경건하게 기도하는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교수형을 처하는 일까지 자행했다.

이민 4대인 케네디가 활동할 무렵에는 아일랜드인들이 경제적으로 큰 자립을 이루긴 했으나 여전히 사교계에서는 물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과 활동의 제약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안에서 청교도가 아닌 가톨릭신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 최초의 가톨릭신자 대통령인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수많은 핍박과 차별에 시달려야했다. 그의 모든 활동에서 ‘가톨릭 신자’라는 신분은 심각한 결격 사유가 됐다. 공공연한 질타의 대상이 됐고, 곳곳에서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29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으며 이후로도 46세 나이로 대통령이 될 때까지 눈부신 활동으로 미국의 정치역사를 새로 써왔지만, 당시 여론은 그가 나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그 이면에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당시 가톨릭신자가 대통령이 되면 교황청으로 어떤 지시를 받지 않을까하는 강한 의혹을 품고 강력한 반대를 고수했다.

젊은이 ‘평화봉사단’ 창설

그러나 케네디는 어떠한 순간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종종 “국민의 권리가 국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받은 것”이라며 “우리는 각자의 신앙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하며 각자의 삶에서 신앙을 증명해야한다”고 강조해왔다.

케네디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늘 하느님 앞에 가장 먼저 머리를 숙이고 매순간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은 당시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후 유럽순방 중에 아일랜드를 방문해 이러한 연설을 한 바 있다.

“나의 증조부가 이 아일랜드를 떠나 동보스턴에 자리잡았을 때 그가 가진 것은 강렬한 신앙심과 자유에 대한 갈망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저희는 그러한 조상들의 신앙과 신념을 존중한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서 밝힐 수 있어 기쁩니다.”

케네디의 방문 이후 당시 아일랜드 전역에서는 집집마다 성모상 옆에 케네디의 사진을 둘 정도로 그는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케네디는 세계평화 실현에 대한 신념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핵무기사용금지조약을 성공시켰으며, ‘평화봉사단’ 창설 등을 통해 젊은이들이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했다.

또 짧은 임기 중에도 가난한 이들과 핍박받는 이들 특히 흑인들의 인권 회복에 투신했고, 각종 사회사업과 공공사업도 적극 펼친 정치인으로 추앙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평전을 저술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그는 텍사스주에서 암살테러로 인해 안타깝게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암살사건은 범인의 사망으로 인해 숱한 음모설만을 남긴 채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돈독한 신앙심을 갖춘 그의 가족들은 사건의 전모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를 추궁한다고 해서 죽은 케네디가 다시 살아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그들은 기도와 가족애로 난관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당시 아일랜드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성경을 직접 가져다 그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그렇게 선서한 케네디의 신앙적,정치적 업적은 여전히 세계사 위에서 빛나고 있다.

주정아 기자